부모님께 스마트폰 지도 앱을 알려드리다가 그냥 제가 직접 해버린 적이 있습니다. 설명을 해도 잘 모르시고 옆에서 보고 있으면 너무 답답해서요. 그렇게 몇 번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이러면 영영 혼자 못 하시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다음부턴 아무리 답답해도 말로만 알려드렸습니다. 직접 하시게끔. 첫날은 거의 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같은 곳에서 막히고, 같은 버튼을 또 잘못 누르시고 방향도 반대로 보시고… 한참을 하시고는 겨우 성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또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또 말로만 알려드렸죠. 아… 그냥 해드릴까 싶은 순간이 여러 번 왔지만 참았습니다. 며칠 지나서 또 물어보셨고 저는 또 같은 방식으로 알려드렸어요. 지금은 스스로 잘 쓰십니다.
KBS 인간극장 ‘날아라 지윤아’를 보면서 그 한 시간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혼자 해볼 수 있도록
2010년 8월에 방송된 이 방송의 주인공은 다운증후군을 가진 열아홉 살 백지윤 씨입니다. 발레리나가 꿈인 지윤 씨는 보름 앞으로 다가온 콩쿠르를 준비하고 있었고, 장애인을 위한 대회가 없어 비장애인 대회에 나가야 했습니다. 연습 공간도 좁은 거실과 경로당을 빌려 썼습니다.
방송 첫 장면부터 지윤 씨는 옷에 바늘을 꿰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도와주려 하자 싫다고 했습니다. 반나절이 걸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혼자 했습니다.
방송 내내 지윤 씨가 하는 일들은 비슷한 결이었습니다. 돈 계산이 어려워도 직접 잔돈을 셌고, 복지관 직업 훈련이 끝난 뒤 이력서를 스스로 썼고, 엄마 아빠가 힘들어 보인다며 가족을 위해 저녁을 차렸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실수도 했고, 시간도 걸렸습니다. 그래도 이런 일들을 혼자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지윤 씨 스스로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국립발레단 아카데미 수업이 잡히면서 아버지가 예술의전당까지 가는 길을 함께 다녔습니다. 집에서 한 시간 반 거리, 버스 두 번에 지하철 환승까지 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환승 방향부터 출구 번호까지 하나하나 알려줬습니다. 방향을 틀리면 어느 역인지, 어느 쪽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 반복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지윤 씨 혼자 가게 했습니다. 지윤 씨도 그걸 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기다린다는 것
저는 부모님께 ChatGPT를 알려드릴 때는 앱을 설치하는 것부터 직접 하시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어하셨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은 친구분들이랑 카톡 하듯 능숙하게 잘 하십니다. “지피티야, 오늘은 날씨가 어떠니?” 하시면서 친구 대하듯요. 지도 앱도 이제는 쉽다고 하시며 친구들에게 알려주시기도 하셨다면서 뿌듯해 하십니다. 첨에 잘못 누르셔도 바로 알려드리지 않고, 스스로 하실 수 있게 말로만 알려드렸던 시간이 쌓인 결과였습니다. 너무 잘 했다 싶었습니다.
지윤 씨가 혼자 버스를 타고 가던 날, 지갑을 집에 두고 왔습니다. 동생이 가져다줬지만 시간이 지체됐고, 지각할 것 같다는 생각에 버스 안에서 울었습니다. 지하철에서는 방향을 헷갈려 멈칫했고, 모르는 승객에게 물어봐야 했습니다. 그러다 안내 방송이 들리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수업에 늦었지만 도착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지윤 씨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 없었던 아버지가, 함께 걸었던 그 한 시간 반짜리 길을 지윤 씨가 혼자 기억해내고 있었습니다. 실수하고 울고 물어보면서요.
저도 저희 부모님도 지윤 씨 가족과 비슷한 시간을 견디고나니 이젠 서로가 행복해졌습니다.
한 번 더 기다려주는 일
지윤 씨 가족은 지윤 씨가 직접 해볼 자리를 남겨둡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실수가 있어도 바늘을 꿰고, 잔돈을 계산하고, 먼 길을 찾아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어머니는 지윤 씨가 직업 훈련을 받는 동안 복지사로 일했고, 아버지는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로 당구장을 운영했습니다.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가족은 지윤 씨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면서도, 혼자 해볼 수 있는 일까지 가져가지는 않았습니다.
콩쿠르 당일 무대에서 음악이 끊겼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고였습니다. 지윤 씨는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 침착함을 보면서 저는 지윤 씨가 그동안 혼자 해본 일들을 떠올렸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아도 다시 해본 경험들이 무대 위의 지윤 씨와 겹쳐 보였습니다.
지윤 씨 어머니는 방송에서 딸에게 상처 없었던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지윤 씨가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견뎌온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서 기다려준 시간들이 보였습니다. 해내는 경험이 쌓이려면, 먼저 해볼 기회가 있어야 했으니까요.
열다섯 해 뒤 근황. 다른 무대에서
수상 소식을 듣고 신나하던 날, 지윤 씨는 이미 9월 콩쿠르 이야기를 했습니다. 머리 장식을 통에 넣으면서 다음에 또 쓸 거라고 했습니다. 그 모습이 딱 지윤씨 다워 보였습니다. 다음번에 또 해보는 사람 말이죠. 그게 지윤 씨가 여기까지 온 방식이었으니까요.
2025년 10월, 지윤 씨는 ‘다시 한 번 날아라 지윤아’로 인간극장에 돌아왔습니다. 서른세 살이 된 지윤 씨는 부상으로 약 3년 전 발레를 내려놓았지만, 이번에는 수백 줄의 대사가 적힌 대본을 들었습니다. 연극 〈젤리피쉬〉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섰고, 태권도 2단 승급시험에도 합격했습니다. 이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통합 예술극단에 합류해 노래에도 도전했습니다.
2010년 머리 장식을 통에 넣으며 다음 콩쿠르를 말하던 지윤 씨는, 15년 뒤에는 다음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꿈은 달라졌지만 ‘다음번에 또 해보는 사람’이라는 모습은 그대로였습니다. 한 번 더 기다려준 시간은 그렇게 다른 무대에서도 쓰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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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KBS 인간극장 - 날아라 지윤아 (2010.08.16. ~ 08.20.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LbtTZloTLSQ
KBS 인간극장 - 다시 한 번 날아라 지윤아 (2025.10.13 ~ 10.17.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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