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직장으로 돌아온 소리 씨는 낯선 업무 화면 앞에서 여러 번 손을 움직입니다. 소근육을 자유롭게 쓰기 어려워 시간이 조금 더 걸리지만 멈추지는 않습니다. 필요한 순서를 바꿔가며 결국 일을 마친 뒤 환하게 말합니다.
“성공했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소리 씨의 손보다 방법이 보였습니다. 정해진 방식이 불편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시 찾는 사람. 안 될 거라는 판단을 먼저 받아들이기보다, 직접 해본 뒤 결과를 확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KBS 인간극장 ‘거침없는 소리가 온다’는 뇌병변 장애가 있는 11년 차 서울시 지방공무원 김소리 씨와 다섯 살 연하 남편 방정수 씨, 14개월 아들 이안이의 일상을 담았습니다. 2026년 2월 16일부터 20일까지 방송됐으며, 당시 소리 씨는 육아휴직을 마치고 구청 보건소의 새로운 부서로 복직한 참이었습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남이 정하게 두지 않는 사람
소리 씨는 공부하고 취업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자신의 시간을 ‘보통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보통의 과정마다 남들보다 더 오래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국립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에도 취업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소리 씨는 청주를 떠나 서울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서울시 지방공무원이 됐습니다. 새로운 부서에 갈 때마다 처음에는 자신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시선도 만났습니다. 그럴 때 소리 씨는 말로 길게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일해보면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운전도 그렇습니다. 소리 씨의 운전 경력은 17년입니다. 몸이 불편한데 운전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사실은 이미 오랫동안 운전해왔다는 것입니다. 소리 씨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몸을 잠깐 바라본 사람이 아니라, 그 일을 계속해온 시간이 더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소리 씨를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라는 말로 정리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소리 씨는 장애가 없는 사람이 되려고 애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필요한 도움을 받으며 원하는 생활을 이어온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일단 한 걸음 가보고 생각해보자
소리 씨를 보면서 제가 오래 다니던 사무직을 그만두고 야간 물류 현장으로 옮겼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사무 일만 해온 제가 몸을 쓰는 일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시작하기 전에는 저도 알 수 없었습니다.
막상 현장에 들어가 보니 예상과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몸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지만 마음이 너무 편했습니다. 사람을 상대하며 쌓이던 감정 소모가 사라졌고, 맡은 일을 마치면 하루가 분명하게 끝났습니다. 잠도 쿨쿨 개운하게 너무 잘 잤습니다. 남들이 안정적이라고 말하는 일이 반드시 나에게도 편한 일은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물론 좋은 답만 얻은 것은 아닙니다. 반복해서 무거운 물건을 다루다 손목과 손가락, 팔꿈치에 통증이 생겼고 결국 일을 그만둬야 했습니다. 직접 해봤다고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 선택을 실패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몸을 많이 쓰는 일은 오래 하기 어렵다는 것과, 다음 직장에서는 감정노동이 적은 일을 찾고 싶다는 것을 동시에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느 쪽도 정확히 몰랐을 겁니다.
저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모든 답을 구한 뒤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확신이 있어서라기보단, 일단 한 걸음 가보고 생각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더 많았습니다. 어떤 문은 들어가 봐야 나와 맞는지 알 수 있고, 어떤 길은 걸어봐야 돌아서야 할 때도 보였습니다.
도움받는 것과 해볼 기회를 넘기는 것은 다르다
소리 씨가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할 때 남편 정수 씨가 먼저 손을 보태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도 소리 씨는 자신이 해보겠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하고 싶어 합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손목과 손가락을 다쳐 쉬던 중에 조금 나아진 것 같아서 설거지를 해보려고 했더니 짝꿍이 아직 안된다며 제 손에서 수세미를 뺏듯이 낚아챘습니다. 당연히 걱정되서 그랬던거고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습니다. 다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해보려던 참이었는데, 확인할 기회 자체가 사라지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한번 해보고 못하겠으면 도와달라고 할게”라고 말하고 다시 시작했습니다. 무거운 냄비는 끝내 들지 못했고, 가벼운 그릇과 컵은 제가 닦았습니다. 해봐야 알 수 있었던 것들이었습니다.
도와주는 것과 그 사람의 기회까지 대신 가져가는 것은 다릅니다. 소리 씨가 몇 번이고 “내가 할게”라고 말하는 장면이 그래서 고집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자신이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소리 씨는 자신의 장애가 훗날 이안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저는 그 걱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소리 씨의 몸인지, 장애를 바라보는 바깥의 시선인지 생각했습니다. 소리 씨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완벽하게 해내는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숨기지 않고 담담하게 살아가는 태도였습니다.
몸의 대답도, 시작 전의 겁도 무시하지 않기
소리 씨의 삶을 무조건적인 도전이나 성공 이야기로만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노력한다고 모든 한계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도움이 필요한 순간도 분명히 있습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면서까지 끝까지 버티는 것이 용기는 아닐 겁니다.
다만 해보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붙여놓은 결론을 자신의 답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소리 씨는 공부와 취업, 결혼과 출산, 복직을 거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직접 알아왔습니다. 가능한 일은 계속했고, 불편한 방식은 자신에게 맞게 바꿨습니다.
저도 앞으로 모든 일을 끝까지 버틸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일단 한 걸음 가보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다만 몸이 보내는 대답은 제대로 듣되, 시작하기 전의 겁까지 정답으로 믿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현재 소리 씨 가족은 유튜브 채널 ‘거침없는 소리가족’을 운영하며 일상을 나누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봤던 이안이가 조금씩 자라는 모습과 두 사람이 함께 꾸려가는 하루가 그곳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세 사람의 평범한 하루가 보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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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KBS 인간극장 - 거침없는 소리가 온다 (2026년 2월 16일 ~ 20일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Q7TZWCFh_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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