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인간극장 ‘레스, 그대와 함께라면’에서 레스는 매일 아침 한국어 문장을 연습합니다. 교재를 펼쳐 단어를 외우는 공부는 아닙니다. 그날 가장 잘 말하고 싶은 문장을 하나 정해 입으로 여러 번 굴려보는 겁니다.
“우리 와이프는 제일 예쁜 여자예요.”
공부라기보다 연습에 가까운 그 시간을 보면서, 저는 한참 화면을 멍하게 바라봤습니다.
저도 한때 일본어를 배우겠다며 어휘집을 펼친 적이 있습니다. 첫 장은 열심히 봤는데 두 번째 장쯤에서 덮었습니다. 단어는 많았지만 그 말을 누구에게, 어디에 쓰고 싶은지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레스는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잘하고 싶은 문장이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서로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방식
수진 씨는 채식주의자입니다. 레스는 캐나다 사람이고 고기를 좋아합니다. 두 사람의 밥상에는 이 간극이 그대로 보입니다. 수진 씨는 두부 김치를 차려두고, 레스가 먹을 닭고기를 따로 준비합니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그릇 앞에서 웃습니다.
방송에서 수진 씨가 레스에게 매운 음식을 슬쩍 먹이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작전을 짜고, 속여서 먹이고, 얼굴이 빨개지는 걸 보며 박장대소합니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유쾌한 장난거리로 만드는 부부가 보기 좋았습니다.
저한테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요. 저는 고수를 좋아합니다. 불고기에도 넣어 먹고, 삼겹살 쌀 때도 같이 싸 먹고, 쌀국수는 뭐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국 사람 중에 고수 향을 유독 못 견디는 분들이 많아서 같이 먹자고 권하기도 눈치 보이는 편인데, 제 짝꿍 Uno는 어느 순간부터 슬쩍 같이 먹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꽤 잘 먹게 됐습니다. 제가 먼저 권한 것도, 억지로 먹인 것도 아닌데, Joy가 좋아하는 건 나도 알아야지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뭔가 멋쩍으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또 하나가 있는데, 저는 성격이 좀 급하고 걸음도 빠르고 신나는 노래를 좋아하는 편인데, 짝꿍은 정반대입니다. 화를 낼 때도 그냥 얘기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차분하고, 노래도 발라드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저도 발라드를 듣는 시간이 늘었고, 대화할 때 조금은 더 천천히 말하게 됐습니다. 취향이 바뀐 건지, 그냥 Uno와 같이 있다 보니 물든 건지 잘 모르겠는데,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 세계에 들어가 본다는 건 그런 거 같습니다. 취향은 그대로인데 그 사람이 조금 더 보이는 것.
레스가 수진 씨 몫 두부를 따로 챙겨 놓고, 수진 씨가 레스의 서툰 한국어 예문에 함께 웃어주는 장면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함께 아는 것이 전보다 많아질수록 같이 웃을 수 있는 일도 많아진다는 걸, 이 부부가 조용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말보다 먼저 양조장에 들어간 사람
지역 축제에서 수제 맥주를 팔던 날, 레스는 한국어로 호객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말은 생각만큼 쉽게 나오지 않고, 사람들은 좀처럼 판매대 앞에 멈추지 않습니다. 한국어가 서툰 탓도 있겠지만, 낯선 사람에게 자신이 만든 것을 내밀 때의 주춤함은 언어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그때 수진 씨가 도착해서 분위기를 바꿔놓습니다. 호객도 계산도 혼자 다 해내고, 이날 매출은 50만 원가량까지 올라갑니다. 그 숫자보다 눈에 들어온 것은 수진 씨가 레스 옆에 서는 방식이었습니다. 잘될 거라고 말해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앞치마를 두르고 손님을 불렀습니다.
레스가 캐나다로 돌아가 2년 동안 맥주 제조를 공부할 때도 수진 씨는 함께 갔습니다. 평창에 양조장을 연 뒤에는 주말마다 주방 일을 맡았습니다. 레스가 좋아하는 일을 자기 일처럼 대신 살아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일이 얼마나 고되고 즐거운지는 옆에서 함께 겪었습니다.
레스는 수진 씨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한국어로 연습하고, 수진 씨는 레스가 만든 맥주를 팔기 위해 낯선 손님 앞에 섭니다. 한 사람은 상대의 언어로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상대의 일터로 들어간 셈입니다.
수진 씨는 레스를 만나기 전에는 노는 법을 잘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레스가 올려다보는 별과 꽃을 함께 보고, 양조장과 축제장을 따라다니면서 수진 씨가 알던 삶의 범위도 조금씩 달라졌을 겁니다.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 본 시간이 결국 자신의 생활까지 넓혀놓은 것입니다.
캐나다 할머니의 열무김치
시어머니 웬디 여사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수진 씨는 어머니를 잃은 지 얼마 안 된 상태였습니다. 웬디 여사는 원래 일정보다 일찍 한국에 왔습니다. 캐나다에서 15시간을 날아온 이유를 특별히 설명하지 않았고, 수진 씨도 굳이 묻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열무김치를 담그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금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도 헷갈리고, 버무리는 양도 가늠이 안 돼서 결국 망했다며 둘 다 웃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김치를 담가본 횟수도 제각각이고, 한 명은 슬픔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그 부엌에서 같이 뭔가를 해보려 했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가까워진 거였습니다.
잘해야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망해도 괜찮고, 어설퍼도 괜찮습니다. 상대방 세계 안에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뭔가를 하고 있는 거니까요.
방송 막바지에 레스가 병에 라벨을 붙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계로 찍은 것처럼 정확한 수평으로, 한 장 한 장 붙입니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 사람이 맥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손이 먼저 말하고 있었습니다. 수진 씨가 그 옆에서 주방을 맡고, 레스가 라벨을 붙이는 그 자리.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공간에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이제 두 사람은 이미 같은 세계에 서 있다고 봐도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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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인간극장 - 레스, 그대와 함께라면 (2019년 9월 30일 - 10월 4일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CoIAviu0_Us&t=7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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