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해영 씨의 이상한 진료실’ 리뷰|이름을 불러주는 병원

병원에서 밥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원도 아니고 환자입니다.

새벽같이 나와 침대를 데워 두고, 아침 밥상을 차리고, 향을 켜 두는 사람. 애순 엄마라고 불리는 어르신은 영광의 한 내과 병원에 매일 나옵니다. 진료를 받으러 오는 것도 아닙니다. 눈을 뜨면 가고 싶은 곳이 생겼고, 그곳이 이 병원이었습니다.

인간극장 ‘해영 씨의 이상한 진료실’을 보면서 저는 오래전 동네 병원 생각이 났습니다.


동네 병원과 선생님의 말

어릴 때 단골 병원이 있었습니다. 감기에 걸려도, 내성 발톱이 또 말썽을 부려도, 피부가 가렵거나 배탈이 나도 엄마는 늘 같은 병원에 데려가셨습니다. 내과인데 이것저것 다 봐줬습니다. 대기실에 앉으면 원장 선생님이 제 이름을 불러줬고, 지난번 상태가 어땠는지 다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게 참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자주 가지 않게 됐습니다. 몸이 좀 더 튼튼해진 건지, 어쨌든 졸업할 무렵에는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대학에 가기 직전, 인사를 드리러 한번 들렀습니다. 진료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가야 할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은 바쁜 중에도 잠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정확한 문장까지 그대로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말씀의 뜻은 이랬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네가 직접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건 부모님이야. 내가 보니 다행히 넌 좋은 부모님을 만난 것 같애. 그래도 앞으로 너의 인생은 네가 직접 선택할 수 있어. 무슨 공부를 할지, 어떤 일을 할지. 힘든 일도 있겠지만, 네 위치에서 많이 고민하고 최선의 선택을 했으면 해.”

처방전도 진단서도 아닌 그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병원에서 나오면서 저는 왜 그 말을 들으러 거기 갔나 잠깐 생각했는데, 한참 지나고 보니 그냥 제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보고 싶었던 것 같았습니다. 졸업이라는 마디 앞에서, 나를 아는 누군가의 얼굴이 필요했던 거겠죠.

진료를 봐주는 사람과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 선생님은 둘 다였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게 대단한 일처럼 들리지 않을 수도 있는데, 한번 그런 사람을 만나고 나면 기준이 바뀝니다. 그 뒤로는 병원에 가서 번호표를 뽑고 앉아있으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났습니다.

30여년 전 그 병원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는 모릅니다. 확인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운영 중인지, 조용히 문을 닫았는지. 그냥 기억 속에 두기로 했습니다. 그 선생님의 말은 이미 받았으니까요.


환자가 먼저 문을 여는 병원

KBS 인간극장 ‘해영 씨의 이상한 진료실’은 2025년 1월 27일부터 31일까지 방송됐으며, 전남 영광의 재래시장 옆에서 내과를 운영하는 당시 54세 정해영 씨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 방송이 2025년 방송이라니 너무 놀랐습니다. 30여넌 전 제 단골 병원과 모습이 많이 닮아 있어서요.

영광의 해영 씨 병원은 실제로 이상합니다. 좋은 의미로요.

한 손님이 나물을 팔아 달라며 병원으로 찾아옵니다. 팥죽을 끓여오는 이웃이 있고, 농사 지은 쌀로 가래떡을 뽑아 해마다 가져오는 농부도 있습니다. 병원 냉장고에는 환자들이 싸준 김치가 들어 있고, 의사는 퇴근길에 어르신 집에 들러 삐그덕거리는 못을 뽑아 드리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이 장면들이 낯설었습니다. 병원에서 이래도 되나 싶기도 했고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이게 그냥 이 사람이 사는 방식이었습니다. 해영 씨는 가운을 벗고 진료를 봅니다. 편하게 입고, 편하게 진료받는 곳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아침 첫차를 타고 읍내로 나와 오후 버스로 돌아가야 하는 어르신들에게 병원은 기다릴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진료가 끝난 뒤에도 점심을 먹고 가는 어르신들이 있고, 해영 씨는 그걸 별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영 씨의 첫 직장은 외국계 IT 회사였습니다. 서른한 살에 다시 의대에 들어갔고, 마흔에 영광에서 병원을 열었습니다. 친구들은 이 정도 이력이면 광주에서도 충분히 잘될 텐데 왜 시골로 가느냐며 말렸다고 합니다. 병원은 환자가 필요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영광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보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방송 당시를 기준으로 약 9년 전, 위암 수술을 앞둔 해영 씨는 ‘내가 이 세상에 왔다 가는 이유가 뭘까’를 생각했습니다. 그가 찾은 답은 자신을 기억해줄 사람들이 모두 병원에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한번 세어봤습니다.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어느 날 문이 닫혔구나 하고 알아챌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직업이나 역할을 떠나서, 그냥 나라는 사람으로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일

해영 씨는 환자 이름을 외웁니다. 출근하면 아침 인사처럼 한 명씩 이름을 불러 안부를 확인합니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어르신이 있으면 직접 찾아갑니다. 청각이 좋지 않은 환자와는 눈을 맞추며 이야기합니다. 전문 수화를 배운 건 아닌데, 그 눈 맞춤으로 대화가 됐다고 했습니다. 백 살 할머니와 백 살이 되면 백설기를 나눠 먹기로 약속했고, 그날이 오자 떡을 준비했습니다.

어머니는 해영 씨가 개원하면서 묵혀두었던 약사 면허증을 꺼내 15년째 옆 약국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의사인 아버지는 급한 날 병원을 맡아 대신 진료를 보기도 합니다. 해영 씨가 아플 때는 고등학교 동창인 주치의에게 갑니다. 이 병원은 해영 씨 혼자의 병원이 아닌 셈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간과 자리가 모여 있는 곳입니다.

해영 씨의 병원에는 해마다 혼자 버스를 타고 오는 백 살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진료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장님이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버스를 혼자 타고, 가방을 메고, 읍내까지 나오는 그 할머니의 얼굴이 한참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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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KBS 인간극장 - 해영 씨의 이상한 진료실 (2025년 1월 27일 ~ 31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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