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사 한복판에서 남편의 입에서 존댓말이 튀어나옵니다. "신 수의사님, 죄송합니다." 집에서는 여보, 자기 하던 사이인데 소 앞에만 서면 호칭이 바뀝니다. 대동물 수의사 부부, 아내 신민정 씨는 5년 차 베테랑이고 남편 이건학 씨는 아내가 다니는 동물병원에 들어간 인턴입니다.
대학 2년 후배에 연하인 남편에게 아내는 말 그대로 하늘 같은 선배님. 그 어색하고도 웃긴 거리감을 보다가, 저는 옛날에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의 사장님 부부가 생각났습니다. 부부가 한 일터에서 함께 일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 저는 그 카페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적이 있거든요.
축사에서는 “신 수의사님”
민정 씨는 소를 전문으로 진료하는 대동물 수의사입니다. 가운 대신 방역복을 입고, 병원 대신 축사로 왕진을 다니며, 영하 273도의 액체질소 탱크에서 정액을 꺼내 해동한 뒤 인공수정을 합니다.
덩치 큰 소를 다루는 일이라 이 분야엔 여성 수의사가 드문데, 민정 씨는 목장주들이 믿고 맡기는 소들의 주치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반면 남편을 '500원'이라는 애칭으로 저장해 둔 다정한 아내이기도 합니다. 500원짜리 동전 뒷면에 학이 있으니까, 이건 학. 이런 실없는 농담이 재밌는 신혼입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온도가 달라집니다. 수정란 이식 중에 소가 갑자기 주저앉자 민정 씨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집니다. 넘어질 것 같으면 미리 말해줘야지, 우리가 양쪽에 서 있는 이유는 커뮤니케이션 때문이잖아. 소가 잘못 넘어지면 팔이 부러질 수도 있는 일이라, 조곤조곤한 말투가 오히려 더 무섭습니다. 생명을 다루는 현장에서 아내는 봐주는 법이 없고, 남편은 서운함을 삼킵니다. 집에 돌아온 저녁, 피자를 사이에 두고 겨우 화해를 합니다.
카페에서 ‘여보’를 금지한 부부
제가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의 사장님은 바리스타였고, 남편분은 로스터였습니다. 당시 결혼 13년 차 부부였는데 사이가 참 좋아서 일하는 저까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신기했던 건 호칭이었습니다. 카페 안에서만큼은 서로를 사장님, 로스터님이라고 깍듯이 부르고 존댓말을 썼습니다.
부부끼리 왜 저러나 싶었는데, 나중에 이유를 들었습니다. 카페를 차렸던 초반에는 그냥 여보, 자기라고 불렀는데 그러니까 오히려 싸우게 되더랍니다. 그래서 아예 남처럼 역할을 딱 정해놓고 서로 존대하기로 했고, 그 뒤로는 거짓말처럼 좋아졌다고요.
알바생 입장에서도 그 규칙은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사장님과 로스터님의 역할이 딱 나뉘어 있으니 누구에게 뭘 물어봐야 할지 헷갈릴 일이 없었고, 부부 사이의 기류를 살필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두 분이 서로를 존대하니 이상하게 알바생인 저까지 더 존중받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회식 자리에서 오래된 직원분이 재밌는 폭로를 했습니다. 예전엔 두 분이 카페에서 싸우는 걸 자주 봤다고,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서 눈치 보느라 혼났다고요. 그러자 사장님 부부가 “맞아, 우리 그때 어마어마하게 싸웠었지” 하면서 같이 웃었습니다. 존대라는 규칙은 부부의 감정과 카페에서의 업무를 분리하면서도 사랑을 지켜내려고 만든 울타리였습니다.
방송 속 민정 씨와 건학 씨는 지금 그 카페 부부의 초반을 지나는 중입니다. 여보와 신 수의사님 사이에서, 사랑과 업무 사이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건학 씨는 아내가 동기에게는 상냥하면서 자기한테만 차갑다고 서운해하고, 민정 씨는 남편이라고 봐준다는 말을 들을까 봐 더 냉정해집니다.
생각해 보면 두 사람 다 상대를 아끼는 방식이 어긋났을 뿐입니다. 한 사람은 사랑받고 싶어서 서운하고, 한 사람은 사랑을 들키기 싫어서 차갑습니다. 카페 부부가 서로 편안해 지는 규칙을 찾았듯이 이 수의사 부부도 분명 그럴겁니다.
혼낸 뒤 건넨 한마디
그래도 이 부부의 다툼 끝엔 토닥거림이 있습니다. 민정 씨는 다그친 날 저녁이면 남편이 기분 상했을까 봐 걱정하고, 건학 씨는 아내가 얼마나 힘들게 5년을 버텼는지 일해보고서야 알았다며 그동안 찡찡댔던 걸 미안해합니다.
민정 씨의 1년 차 시절 일기장에는 그날그날 공부한 내용이 해부학 그림과 함께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건학 씨는 그 일기장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실습생 시절의 기록을 찾겠다고 뒤적입니다. 라이터도 못 켜던 실습생이 이제 그 선배의 남편이자 후배가 되어 있으니,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합니다.
민정 씨가 남편에게 해준 말이 이 방송의 가장 따뜻한 대목이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데 5년이 걸렸는데 자기는 훨씬 빠르게 잘하고 있다고, 천천히 하면 진짜 좋은 수의사가 될 거라고. 무섭게 혼내는 사람과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 좋은 사수의 정의가 있다면 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부는 언젠가 건학 씨의 고향 청양에서 함께 동물병원을 여는 꿈을 꿉니다.
방송 이후, 나란히 선 두 수의사
두 사람의 소식도 찾아봤습니다. 2023년 공개된 인터뷰에 따르면 민정 씨는 여전히 고려동물병원에서 소의 임신과 출산을 관리하는 대동물 수의사로 일하고 있었고, 첫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건학 씨도 같은 병원에서 대동물 수의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방송에서 “신 수의사님,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아내의 뒤를 따라다니던 인턴이 어느새 같은 현장을 지키는 동료가 된 겁니다. 두 사람이 지금도 축사에서 서로를 ‘신 수의사님’과 ‘이 수의사님’이라고 부르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사이 혼나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의 자리를 오가며, 부부에게 맞는 일터의 호흡을 찾아갔을 것 같습니다. 집에서는 부부로, 축사에서는 동료로 살아가는 두 사람에게 지금은 어떤 호칭이 생겼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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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KBS 인간극장 - 내 아내는 보스 (2022. 9. 12. ~ 9. 15. 방영)
https://www.youtube.com/watch?v=rFPfNkaK_WI
- 축산경제 - ‘축산 현장 지금은 여성시대Ⅳ’ 신민정 고려동물병원 수의사
https://www.chukkyu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68535
- 신민정 씨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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