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탁에서 아홉 살 지민이가 받아쓰기를 합니다. "우리 엄마는 빵을 잘 만들어요." 또박또박 쓰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아빠는 재촉하지 않습니다. 다 쓴 공책을 들어 보이는 아이에게 돌아오는 건 "혼자 썼어? 그렇지." 한마디뿐입니다.
캐나다에서 온 아빠 폴 잼버 씨와 다섯째 출산을 앞둔 엄마 이은미 씨, 그리고 네 남매가 사는 집의 평범한 아침입니다. 저는 이 아침 장면 하나로 이 집이 어떤 집인지 다 본 기분이 들었습니다.
받아쓰기를 재촉하지 않는 아침
쌍둥이 지민이와 지원이는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쓰는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또래보다 언어가 늦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도 한글 읽기가 스트레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늦어도, 조금 느려도 문제될 게 없다고, 아이들에겐 저마다의 속도가 있고 믿고 기다려주면 결국 자기 속도를 찾아낸다고 믿습니다.
교육학을 전공한 폴 씨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을 빌려왔습니다. 한글 카드를 상대보다 먼저 읽으면 이기는 놀이. 게임이 끝나고도 아이들이 스스로 카드를 붙잡게 만드는, 공부 같지 않은 공부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 친구의 첫째 아들이 생각났습니다. 중학교 교사인 친구는 아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반응이 또래보다 느린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너무 어려서 그런가 싶다가도, 문화센터에서 비슷한 개월수 아이들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소극적이고, 뭘 먼저 하려 들지 않고, 엄마 품에서만 있으려 했다고 합니다.
친구는 복직을 미루고 육아휴직을 연장해 아들이 세 살이 될 때까지 2년을 아이 곁에서 보냈습니다. 친구는 아들을 데리고 매일매일 몸으로 겪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블록, 모래, 촉각놀이, 그림 그리기, 책 읽기, 만들기. 그러면서 철칙 하나를 지켰습니다. ‘절대 먼저 권하지 않는다. 스스로 할 수 있게 옆에서 지켜봐 주고, 안전한지만 확인한다.’
처음엔 별 반응이 없던 아이는 정말 천천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활발해졌고, 또래 친구들도 좋아하게 됐습니다. 사실 친구는 아이의 발달 속도를 전문가와 상의해야 하나 고민할 만큼 마음을 졸였었는데, 아이가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서서히 마음을 놓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한참 뒤에야 들었습니다. 매일 아이와 체험장을 다니던 친구의 속이 그렇게 타들어가고 있었다는 걸, 담담해진 목소리로 전해 듣고서야 알았습니다. 그 아이는 지금 열한 살이고, 올해 초등학교에서 반장이 됐습니다.
친구가 그 소식을 전하던 날 들뜬 목소리를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방송 속 폴 씨 부부의 기다림과 친구의 2년이 저에게는 같은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애들은 다문화 아니에요”
폴 씨는 헝가리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습니다. 집에서는 헝가리어를 쓰고 헝가리 음식을 먹으며 컸기에, 어린 시절 자신이 헝가리인인지 캐나다인인지 혼란스러웠다고 합니다. 그 혼란을 아이들에게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폴 씨는 2014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국적 취득 후 세대주로 처음 자신의 이름을 올리던 순간이 아직도 벅차다는 사람. 그런데도 이국적인 외모와 서툰 한국말 때문에 여전히 이방인 취급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방송에서 폴 씨가 한 말이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우리 애들은 다문화 아니에요. 문화 하나 있어요. 대한민국 문화." 한국에서 태어나 애국가를 부르고 캐나다 국가는 모르는 아이들. 다문화라는 말 자체보다, 그 단어 하나로 아이들을 다 설명한 듯 바라보는 시선이 저는 마음에 걸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이의 한글을 기다려주는 일과 이웃이 이 가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같은 종류의 일입니다. 상대의 속도를 인정하고, 먼저 규정하지 않는 것. 쌍둥이 생일 파티에 온 학부모들이 "지내다 보니 그냥 한국인 아이들로 느껴진다"고 말하는 장면이 그래서 반가웠습니다. 이웃들도 이 가족에게 스며들 시간을 내어주고 있었습니다.
폴 씨가 처음 끓인 미역국
방송의 후반부는 다섯째 지한이의 탄생입니다. 노산에 네 번째 수술이라 출산일을 앞당기게 된 은미 씨는 수술 전날까지 쌍둥이 생일 케이크를 굽고, 냉장고 속 식료품 위치까지 시어머니께 알려드리고서야 병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폴 씨는 난생처음 미역국을 끓입니다.
은미 씨의 친정어머니는 쌍둥이가 태어나고 한 달쯤 뒤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산후조리 미역국을 끓여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아는 남편이, 미역 비린내를 못 견디는 자기 입맛을 누르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국을 끓인 겁니다. 들기름을 참기름으로 착각해 맛은 오묘해졌지만, 은미 씨는 웃으면서 국물을 넘깁니다. 참기름이면 어떻고 들기름이면 어떤가 싶은 장면이었습니다.
캐나다에서 날아온 폴 씨의 부모님께 부부가 준비한 깜짝 선물도 그랬습니다. 결혼 55주년을 맞은 두 분께 처음으로 웨딩드레스와 한복을 입혀드리고 찍은 리마인드 웨딩 사진. 사진기 앞에 앉은 어머니를 보고 코끝이 찡했다는 은미 씨의 말에 저도 같이 찡해졌습니다.
방송 이후 확인된 이야기
2018년 방송이라 가족의 최근 소식은 찾기 어려웠지만, 반가운 걸 하나 발견했습니다. KBS가 2025년 새해에 구독자들의 요청으로 이 편 전편을 유튜브에 다시 공개했더군요. 7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다시 찾는 이야기라는 뜻일 겁니다.
방송 당시 아홉 살이던 지민이와 지원이는 이제 열일곱 살 안팎의 청소년이 되었을 테고, 일곱 살 지우는 열다섯, 네 살 지훈이는 열두 살 정도 되었을 겁니다. 방송 중 태어난 지한이도 초등학생이 되었을 나이입니다. 받아쓰기를 어려워하던 지민이가 지금은 어떤 글씨로 자기 이야기를 쓰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 글을 쓰고 나면 친구에게 이 유튜브 링크를 보내줄 생각입니다. 육아휴직 2년을 보낸 친구는 받아쓰기를 기다려주는 저 장면을 어떻게 보았을지, 아마 바로 울컥할 겁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겠지요. “거봐, 기다려주면 다 자기 속도를 찾아간다니까.” 반장 아들을 둔 사람의 목소리로 말입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인간극장 이야기
인간극장 '유경 씨만 있으면' 리뷰|화물차 핸들을 잡은 네 아이 엄마
인간극장 '내 아내는 보스' 리뷰|아내가 남편의 사수가 된 대동물 수의사 부부
참고
KBS 인간극장 -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2018. 4. 2. ~ 4. 6. 방영)
https://www.youtube.com/watch?v=3XpREccmLyM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