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동갑내기 영농일기’ 리뷰|내가 놀 궁리만 하던 스물셋에

감자밭 한복판에서 부부가 비료 포대를 놓고 실랑이를 벌입니다. 60kg을 어떻게 드냐고 투덜대는 남편 앞에서 아내는 포대를 번쩍 들어 올립니다. 당황한 남편은 "내가 들었어, 내가 들었어"를 연발합니다. 아내는 역도 선수 출신, 그걸 깜빡한 겁니다. 

충북 괴산에서 한우 80여 마리를 돌보던 스물셋 동갑내기 부부, 신승재 씨와 천혜린 씨의 하루는 이런 장면들로 굴러갑니다. 보는 내내 웃었는데, 웃음이 잦아든 자리에 남은 건 조금 다른 마음이었습니다. 스물셋이라는 나이를 나는 어떻게 지나왔더라, 하는 질문이었어요.


씨름판에서 시작된 두 사람

두 사람의 인연은 대학 체육대회 씨름판에서 시작됐습니다. 덩치가 1.5배는 되는 상대를 혜린 씨가 보기 좋게 넘겨버렸고, 그 장면을 본 승재 씨는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여자 씨름 우승자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혜린 씨는 처음에 이 사람이 정신이 나갔나 했다는데, 그 글쓴이가 지금의 남편입니다. 요즘 같으면 슬쩍 메시지 하나 보내고 말았을 텐데, 전교생이 보는 게시판에 대놓고 이름을 묻다니, 이 남자 정말 돌직구입니다. 그리고 이 남자는 결혼과 농사를 결정할 때도 오래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대학 졸업반에 아기가 찾아왔을 때, 승재 씨는 장인어른께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면서도 잘 살 수 있다고, 자신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혜린 씨는 그 모습에서 확신이 섰다고 했습니다. 덜덜 떨면서도 할 말을 똑바로 하는 스물셋. 스물셋의 저라면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인사말도 제대로 못 꺼냈을 겁니다. 떨지 않는 게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떨면서도 말하는 게 용기였습니다.


내가 놀 궁리만 하던 스물셋

솔직히 고백하면, 저는 스물셋에 대학생이었고 머릿속의 팔 할이 놀 궁리였습니다. 시험만 끝나면 친구랑 어디를 갈까, 방학이 오면 뭘 하고 놀까. 달력에서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게 빨간날 아니면 시험 끝나는 날이었고, 그날 저녁 약속부터 잡아두는 게 한 학기의 낙이었지요. 

그 시절 제 고민의 무게를 다 합쳐도 이 부부가 매일 아침 짊어지는 것보다 가벼웠을 겁니다. 같은 스물셋에 이 부부는 아이를 낳고, 축사를 물려받고, 감자밭 500평을 일구고 있었습니다. 화면 속 두 사람 앞에서 그 시절의 저는 정말 애기였구나 싶어 혼자 웃었습니다.

회사에서 20대 신입들이 들어와도 제 눈엔 아직 애기 같아 보입니다. 일 잘하고 똑똑한 친구들인데도 어딘가 앳된 구석이 먼저 보여요. 

그런데 방송 속 스물셋은 애기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폭우가 쏟아져 축사 앞까지 빗물이 차오르던 밤, 부부는 부모님께 전화하는 대신 둘이서 흙을 퍼다 입구를 막고 하천 쪽으로 물길을 새로 냈습니다. 축사에 물이 들면 감전 사고가 나거나 소가 병이 날 수도 있다는데, 그 급박한 상황에서 스물셋 둘이 침착하게 물길을 트는 모습은 제가 아는 어떤 어른보다 어른스러웠습니다. 인공수정 출장에서 서툰 모습을 보인 날, 승재 씨는 아기가 잠든 밤에 혼자 인터넷을 뒤지며 부족했던 기술을 공부했습니다.

저희 엄마가 예전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이 다르고, 애 낳아본 사람과 안 낳아본 사람이 다르다고요. 젊을 땐 잔소리처럼 흘려들었는데 이 부부를 보면서 그 말이 다시 들렸습니다. 결혼이나 출산 자체가 사람을 바꾼다기보다, 누군가를 책임지는 자리에 서 본 사람은 세상을 대하는 자세부터 달라진다는 뜻이었겠지요. 

방송에서도 비슷한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부모가 돼 봐야 어른이 된다고. 나이가 어른을 만드는 게 아니라 책임이 어른을 만든다는 걸, 스물셋 부부가 마흔 넘은 저에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같은 생일, 그리고 축사 허가

이 부부는 생일이 같은 날입니다. 남편은 출생신고가 한 달 늦어서, 아내는 윤달 음력 생일이라서, 우연이 겹치고 겹쳐 5월 23일 하루에 만났습니다. 어머니는 그걸 두고 운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생일을 앞두고 승재 씨는 몰래카메라를 준비합니다. 갑자기 입영 날짜가 나왔다며 한숨을 푹푹 쉬는 연기에 혜린 씨가 제대로 걸려들었고,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 꽃다발이 등장합니다. 감동인데 짜증이 난다는 혜린 씨의 표정이 잊히지 않습니다. 연애할 때도 안 하던 이벤트를 결혼하고 나서야 하는 남편이라니, 순서가 뒤바뀐 것마저 이 부부답습니다.

마지막 회, 축사 허가가 났다는 소식이 도착합니다. 결혼식 때 종이에 적었던 계획이 하나씩 현실이 되고 있다는 승재 씨의 말에, 온 가족이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막걸리 잔을 부딪칩니다. 4대가 한자리에 둘러앉은 그 저녁이 이 방송의 가장 환한 장면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23살때 계획 같은 걸 종이에 적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날그날의 계획도 놀 궁리가 절반이던 사람이니까요. 스물셋에 인생의 설계도를 적고, 그걸 하나씩 지워가며 사는 부부라니. 

저는 그 장면을 보며 스물셋의 제가 놓친 게 무엇이었는지를 따져보기보다, 저 마당의 불판 앞에 슬쩍 끼어 앉아 막걸리 한 잔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저녁만큼은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방송 이후, 두 아이의 부모가 된 부부

방송을 보고 두 사람의 근황도 찾아봤습니다. 부부는 지금도 괴산에서 ‘비옥한 여물농장’을 꾸리며 유튜브 채널 ‘동갑내기 영농일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농장 이름에는 두 아이의 태명인 ‘여물’과 ‘비옥’이 들어가 있습니다.

승재 씨는 현재 한우 약 70마리를 키우면서 인공수정사 일을 병행하고, 혜린 씨는 육아와 유튜브 영상 편집을 맡고 있다고 합니다. 방송 당시 품에 안겨 있던 첫째 재호 군은 어느새 초등학생이 됐습니다. 영상 속 두 사람의 티키타카는 방송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다음 주에 회사에서 신입들을 마주치면 아마 조금 다르게 보일 겁니다. 애기 같아 보이던 그 얼굴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책임지는 중일 테니까요. 씨름판에서 시작해 축사와 감자밭으로 이어진 이 부부의 영농일기가, 앞으로도 오래오래 한 줄씩 채워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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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영농일기' 유튜브 채널: www.youtube.com/@yeongnong-ilgi

참고: KBS 인간극장 - 동갑내기 영농일기 4412회 (2020. 6. 29. ~ 7. 3. 방영)

https://www.youtube.com/watch?v=sd3OpXLR6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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