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기봉 씨 삼밭에 살어리랏다’ 리뷰|수확이 없어도 씨앗을 심는 사람

친구가 텃밭에 아스파라거스를 심겠다고 했을 때 저는 솔직히 좀 웃겼습니다. 보통 텃밭이라고 하면 상추, 깻잎, 고추 이런거 심지 않나요. 그 친구는 허브를 주로 키우는 편이라 바질이니 로즈마리니 원래도 남들과는 좀 달랐는데, 아스파라거스라뇨.

더 놀란 건 그다음이었어요. 아스파라거스는 심고 나서 최소 3년은 지나야 첫 수확이 가능하다는 걸 친구가 심은 뒤에야 알았다는 겁니다. 1, 2년 차에는 줄기를 튼튼하게 만드는 시기라 수확 자체를 거의 안 한대요. 

저는 당연히 포기하겠거니 했는데, 그 친구는 4년을 정성껏 키워서 튼실한 아스파라거스를 꽤 많이 수확했습니다. 뽑아 먹지도 못하는걸 4년 동안 챙기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저랑은 좀 다른 사람이다 싶기도 했어요.

그때 그 친구한테 왜 포기 안했냐고 물었더니 별 대단한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심어놨으니까 키우는 거지. 되게 싱겁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말이 제일 맞는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극장 ‘기봉 씨 삼밭에 살어리랏다’를 보는 내내 그 친구 생각이 났습니다. 27년이라는 숫자가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요.


수확이 없던 시간에도

기봉 씨가 처음 산골에 들어온 건 27년 전입니다. 등산로조차 찾기 힘들었던 오지에 혼자 들어가 길을 닦고,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산양삼은 농약을 쓰지 않고 자연 상태에 가깝게 길러야 하는 작물인데, 기봉 씨가 자신만의 재배법을 익히기까지는 십수 년의 시행착오가 필요했습니다. 수익을 내기 시작한 것도 방송 당시 기준으로 불과 6, 7년 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20년은 거의 실패의 연속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동안 기봉 씨는 심마니 일을 하며 생계를 잇고, 죽거나 병든  삼을 보면서 재배법을 하나씩 찾아갔습니다.

방송을 보면서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계속 물음표가 붙었습니다. 기봉씨는 IMF 때 빚이 2억 원을 넘었다고 했는데 그때 농사를 포기하고 산을 떠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봉 씨는 계속 씨앗을 뿌렸습니다.

기봉 씨는 오랜 노력 끝에 얻은 기술이 한 사람의 노하우로 끝나지 않고, 이제는 자식에게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는데요. 27년째 이어온 삼 농사에 딸 푸름 씨가 들어와 씨앗을 심고, 그 씨앗이 열 살이 될 날을 벌써 계산하고 있었던 거죠. 본인을 위해서 버틴게 아니라 다음 사람을 위한 씨앗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긴 기다림이 다르게 읽혔습니다.

제 친구도 비슷한 방식이었을 겁니다. 아스파라거스 1~2년 차에 아무것도 따지 않으면서도 물을 주러 나가는 그 반복.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는데도 4년이나 계속 돌본다는 것이 어떤 시간이었을지. 그냥 평범한 내 친구였는데 아스파라거스를 키워서 수확한 걸 보니 뭔가 특별한 사람 같았습니다. 


딸에게 건네는 27년의 기술

딸 푸름 씨는 미술을 전공하고 학원 강사로 일하다가 코로나 여파로 일이 여의치 않아지자 아버지 곁으로 들어왔습니다. 석 달째 농사일을 배우는 중인데, 쉽지 않다는 게 화면에서도 느껴졌어요. 벌레가 많고, 냄새도 나고, 도시와 리듬이 너무 달랐으니까요. 고추밭 뙤약볕 아래서 선크림 타령을 하면서도 낫질을 멈추지 않는 장면이 괜히 웃기면서도 짠했습니다.

기봉 씨는 일을 시키는 방식도 거칠고 잔소리도 많은 아버지였습니다. 묵혀둔 밭을 개간하게 하고 무거운 비료도 직접 나르게 했지요. 그러면서도 딸이 하루아침에 농부가 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씨만 뿌린다고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농부의 발소리를 자주 들은 작물이 잘 자란다는 기봉씨는 딸의 적응도 같은 결로 보고 있었던 거죠.

아버지가 딸에게 바란 것은 그림을 버리고 자신과 똑같은 농부가 되는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생산품 판매나 인터넷 홍보처럼 푸름 씨가 미술 전공과 자신의 능력을 활용할 자리도 농사 안에서 찾고 싶어 했습니다. 딸에게 27년의 기술을 그대로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 위에 딸의 몫을 만들어주려는 셈이었습니다.

푸름 씨가 뱀을 무서워하지 않고 아버지 곁에서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기봉 씨에게 뱀은 없애야 할 존재가 아니라 삼을 훔쳐 먹는 들쥐를 잡아주는 산밭의 파수꾼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곳의 모든 것이 편하지는 않았겠지만, 푸름 씨는 조금씩 아버지가 살아온 산의 질서를 자기 방식으로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고집을 함께 산 가족

아내 지연 씨가 산골로 들어온 건 1년의 별거 끝이었습니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남편은 의논 없이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었고, 지연 씨는 그 결정을 뒤따라야 하는 일이 많았어요. 치매 걸린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함께 모시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을 얘기하는 방식이 담담했습니다. 억울하다거나 힘들었다는 말보다 그냥 그렇게 살았다는 투였어요.

딸이 늦게 귀가한 날, 지연 씨는 화가 난 남편에게 옥수수를 쥐여주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습니다. 곤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 먼저 먹을 것을 건네는 모습에 웃음이 나면서도, 남편의 화를 얼마나 많이 다뤄왔을까 싶었습니다. 

딸 푸름 씨는 아버지를 많이 닮아서인지 부녀 갈등이 잦았습니다. 늦은 귀가 문제로 끝장 토론을 벌이다가도 다음 날 아침이면 또 나란히 삼밭에 나가는 식이었지요. 그 티격태격이 사실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싸우고 나서도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

기봉 씨는 딸에게 심어놓은 씨앗이 열릴 10년 뒤를 내다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쯤이면 자기는 낚시나 다니겠다는 말을 능청스럽게 덧붙이면서요. 삼밭 비탈에서 딸에게 씨앗 심는 법을 가르치던 기봉 씨의 뒷모습이 생각납니다. 그걸 떠올리면 제 친구의 텃밭도 같이 생각납니다. 올해도 아스파라거스가 잘 올라왔는지 물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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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KBS 인간극장 - 기봉 씨 삼밭에 살어리랏다 (2020. 10. 5. ~ 10. 9.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Tkb4VAmoqpI&t=76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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