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60년 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 리뷰|소녀처럼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서

소풍을 간다더니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데려간 곳은 여주 시내의 사진관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온 할머니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사진사의 주문대로 할아버지 볼에 얼굴을 갖다 댑니다.

뽀뽀하는 사진까지 찍고 나서는 남사스러워서 안 되겠다고, 이건 절대 내보내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셨어요. 그래 놓고 며칠 뒤 딸들이 오자 제일 먼저 그 사진부터 꺼내 자랑하십니다. 저는 그 대목에서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2015년 6월 말 방송된 인간극장 〈60년 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은 당시 여든넷이었던 박봉연 할아버지와 여든하나 권혁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6·25전쟁에서 총상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 스무 살 청년과 눈이 크고 얼굴이 뽀얗던 열일곱 소녀. 집안의 반대로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은 배우자와 사별한 뒤 60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고향인 경기도 여주에서 뒤늦은 신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진관 나들이는 함께 산 지 2년이 된 것을 기념해 할아버지가 준비한 깜짝 이벤트였습니다.


사진관에서 날아간 60년

60년 전 두 사람은 기념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흑백사진에 색칠까지 해서 건넨 건 할아버지 쪽이었고, 할머니의 사진은 끝내 받지 못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이 사진 한 장은 여든넷의 노인이 60년 동안 묵혀 둔 숙제를 푸는 일이었죠.

사진을 받아 들고 좋아하시는 할머니 얼굴을 보는데, 어디서 많이 본 표정이었습니다. 소풍 전날 가방을 싸 놓고 잠들지 못하는 아이의 얼굴이었습니다.

여든이 넘은 사람에게서 그런 표정이 나온다는 게 저는 너무 신기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표정도 함께 낡는 줄 알았는데, 이 할머니를 보면 표정에는 나이가 따로 없었습니다.


사랑받는 사람의 얼굴

제게는 오래된 꿈이 하나 있습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할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돈 많은 할머니도, 유명한 할머니도 아닙니다. 그냥 곁에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할머니요. 누가 장래희망을 물으면 우스갯소리처럼 대답해 왔지만, 사실 저는 꽤 진지합니다.

다만 어떻게 해야 그런 할머니가 될 수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방송을 보는 내내 권혁원 할머니가 바로 제가 꿈꾸던 할머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웃을 때마다 얼굴 위로 열일곱 소녀가 잠깐씩 지나갑니다.

방송을 보다 보니 그 웃음이 어디에서 오는지 바로 알겠더라구요. 사랑받는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합니다. 늙었다고, 잔소리한다고 자식도 손주도 시들하게 대하는데 이 양반이 좋아해 주니 행복하다고요. 그러면서 자신도 먼저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게 됐다고 합니다. 전남편과 살던 세월에는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말이랍니다.

그 고백을 듣던 할아버지가 자신도 행복하다고, 자기도 행복해야 한다고 받아치는데 그 짧은 주고받음이 웬만한 드라마 대사보다 몽글몽글했습니다.


딸들도 같은 것을 봤나 봅니다. 사진을 구경하러 온 딸들은 “우리 엄마 공주 됐다”, “여왕이다”, “지금 인생의 황금기를 맞고 계신 것”이라며 한마디씩 합니다.

엄마의 얼굴이 밝아져서 자신들의 마음도 편하다는 말에는 진심이 묻어났습니다. 

그 장면에서 제 꿈을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귀여운 할머니는 혼자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꾸준히 예뻐해 주고, 나도 그 사랑을 쑥스러워하지 않고 받아야 만들어지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연습해야 할 것은 동안 관리가 아니라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겠구나 싶었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 것,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괜히 딴청 부리지 않고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것부터요.

할머니는 꽃다발을 받고 “꽃보다 내가 더 예쁘냐”고 되묻는 분이니까요. 저 넉살을 배우려면 저는 아직 몇십 년은 더 연습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을 ‘무대뽀’라고 부릅니다.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그냥 산다고요. 대신 “나만 믿으라”는 할아버지가 낡은 달력에 병원 가는 날과 기념일을 꼼꼼하게 적어 둡니다.

서로 종교가 달라 아침이면 각자의 방식으로 따로 기도를 드리는데, 이분들 쿨합니다. 80년 넘게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이 상대를 고치지 않고 함께 사는 모습이 좋아 보였습니다.


참기름 한 숟갈

할아버지는 무척 부지런한 분입니다. 새벽에 밭일을 마치고 콩과 옥수수를 넣은 오곡밥을 직접 안치고, 할머니가 설거지하는 사이 벌써 다음 끼니에 먹을 쌀을 씻어 둡니다.

할머니의 정기검진에서 허리가 점점 굽어 간다는 말을 듣고 온 날에는 곧장 맨손체조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으랏차차” 구호까지 붙여 가면서요.

여든넷의 노인이 ‘관장님’ 소리를 들으며 체조 시범을 보이는 장면은 웃기면서도 코끝이 시큰해졌습니다. 의사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그날로 대책을 세우는 사람이라니요.

소풍날 할머니가 싼 김밥을 한 입 먹고는 “배고파야 맛있겠다”고 눙치다가, 도토리묵을 얻어먹고는 금세 고소하다며 말을 바꾸는 모습도 이 할아버지답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김밥에 슬그머니 참기름을 더 두릅니다. 고소하다는 그 한마디 때문에요.

저는 이 몇 초짜리 장면이 이 부부의 모습을 모두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소하다는 말 한마디에 참기름을 더 둘러주는 사이. 신혼이 별건가요.

강변에서 개망초와 쑥부쟁이를 꺾어 즉석 꽃다발을 만들어 건네는 것도, “안 하던 짓을 한다”며 멋쩍어하면서도 흰 꽃과 노란 꽃의 색까지 맞추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든이 넘은 어른들의 연애라고 하기에는 너무 풋풋해서 보는 제가 다 간지러웠습니다.

강변 잔디밭에서는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무릎을 베고 눕습니다. 편하다는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사람 인(人) 자가 서로 기대어 받치고 선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서로 받쳐주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라고요.

어려서 배운 글자 하나를 팔십 년 넘게 품고 살다가 무릎을 내어주며 꺼내놓는 겁니다. 유머와 넉살 사이사이에 이런 말이 툭툭 나오니 할머니가 서울 생활을 접고 여주로 내려온 것도 이해가 갔습니다.

방송이 나간 지 이제 10년이 넘었습니다. 두 분 다 아흔을 훌쩍 넘기셨겠지요. 끝까지 서로 사랑하며 살자던 약속대로, 지금도 여주 어느 마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손잡고 걷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연습을 하고 있겠습니다. 오늘은 고맙다는 말을 한 번 더 하는 것부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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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KBS 인간극장

※ 참고 자료

KBS 인간극장 - 60년 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 (2015년 6월 29일~7월 3일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9D1OLns6c40&t=614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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