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고 나온 수영 씨가 아내 영희 씨와 아침 대화를 나눕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면 좋겠다는 말에, 맨날 좋으면 좋은 줄 모른다는 답이 돌아옵니다. 좋은 일만 있는 천국이라면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지겨워질 거라고요. 세수 한 번 하고 주고받은 대화치고는 꽤 근사한 인생론입니다.
KBS 인간극장 ‘여기에 사는 즐거움’은 2012년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방송됐습니다. 당시 강원도 인제 곰배령 아래 강선마을에서 10년째 살고 있던 김수영 씨와 정영희 씨 부부의 겨울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십 년도 더 지난 방송인데 보는 내내 신기했습니다. 눈에 파묻힌 산골에서 두 사람은 겨울을 견디는 데만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힘든 일이 생긴 날에도 웃을 일을 따로 찾아냈습니다.
눈을 치운 날에도 놀 일은 생겼다
곰배령 위쪽까지는 택배 차량이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눈이 쌓이면 우체국 택배기사가 차가 닿는 마을 어귀에 물건을 맡겨 두었고, 부부가 내려가 찾아오는 방식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오토바이를 이용하지만 그날 영희 씨는 소화가 잘되지 않는다며 운동 삼아 걸었습니다. 걸으면 족히 한 시간이 걸리는 길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어제 본 개울과 오늘의 개울이 또 다르다며 중간중간 걸음을 멈췄고, 눈썰매도 탔습니다.
산 밖으로 내려와서는 산속에 있을 때 보이지 않던 능선이 비로소 보인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늘 그 안에 있을 때는 몰랐던 산의 모습을 잠깐 떨어져 나온 뒤에야 본 겁니다.
저는 계절을 주말에 몰아서 만납니다. 꽃이 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움직이고, 단풍은 남이 올린 사진으로 먼저 봅니다.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면서 달라진 걸 먼저 발견할 수 있는 부부의 시간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눈이 많이 내린 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삽을 들고 나왔습니다. 차를 끌어주고 길을 내느라 온몸에 힘이 빠졌지만, 일이 끝나자 눈밭에서 들통 가득 라면을 끓였습니다. 얼어붙은 개울에서는 얼음축구와 인간 컬링까지 벌였습니다.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몸을 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어쩌다 나쁜 일이 하나 생기면 그날 하루를 통째로 망친 날로 치곤 했습니다. 지치는 일이 있었던 날은 저녁까지 그 기분을 끌고 가서 ‘오늘은 별로였다’ 하며 남은 시간은 그냥 날려 버렸지요.
이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눈을 치우느라 진이 빠진 날에도 집에 돌아와 삼겹살을 구웠고, 노래를 틀어놓고 따라 불렀습니다. 힘들었던 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하루 전체를 끝내지는 않았습니다.
재미라는 게 어디에서 오는지도 다시 생각했습니다. 저는 재미를 늘 밖에서 사 왔습니다. 볼거리, 먹을거리, 갈 곳을 결제하는 방식으로요. 그래서 재미의 크기가 지갑 사정을 따라 달라졌습니다. 반면 이 마을 사람들은 눈이 오면 눈 위에서 놀았고, 사람들이 모이면 라면 한 솥을 끓였습니다. 지갑보단 마음이 꽉 찬 사람들이었죠.
한 달 40~50만 원, 느리게 짓는 집
방송 당시 부부는 한 달 생활비로 40만~50만 원 정도를 쓴다고 했습니다. 봄·여름·가을에 부지런히 일하면 그 정도는 벌 수 있고, 모아둔 재산은 없지만 빚도 없어 마음이 편하다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아파트 대출 이자로만 한 달에 50만 원을 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들에게는 한 달 생활비라며 웃는다고도 했습니다. 적은 돈으로 사는 일을 자랑하려는 말투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돈이 그 정도라는 설명에 가까웠습니다.
영희 씨는 산골 생활 중에도 번역과 원고 작업을 했습니다. 방송에는 사보 원고료 10만 원이 들어온다며 기뻐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영희 씨는 일본어 책을 한국어로 옮겨 여러 권을 출간한 번역가이기도 했습니다.
수영 씨는 집 뒤편에 비닐하우스를 치고 그 안에서 새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여유가 생길 때마다 목재를 조금씩 사 와 혼자 지은 지 3년째였습니다. 집이 언제 완성될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두 사람은 날짜부터 정해 놓고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맞는 집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면서 그때그때 할 수 있는 만큼 지었습니다.
제가 부러웠던 건 한 달 생활비의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얼마가 있어야 충분한지를 알고 있다는 게 부러웠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통장 잔고와 상관없이 갖고 싶은 물건 리스트가 늘 있었습니다. 세일 알림이 뜨면 필요 없던 물건도 필요해 보였고, 사고 나면 리스트에는 다음 물건이 올라왔습니다.
떠나도 나를 두고 갈 수는 없으니
두 사람이 처음부터 산골 생활을 계획했던 것은 아닙니다. 일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영희 씨는 한국에 정착하고 싶었고, 수영 씨는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 영국으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영국으로 갈지 산에서 함께 살지를 고민하다가 곰배령에 남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방송 막바지에는 영희 씨가 이곳을 떠난다고 해도 새로운 문제는 어디에나 생기고 새로운 관계의 어려움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장소가 바뀐다고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므로, 시골이든 도시든 지금 처한 환경에 맞추고 조절할 수 있는 것을 조절하며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일이 꼬이면 ‘여기만 벗어나면’, ‘이 상황만 지나가면’ 하고 다른 자리를 떠올릴 때가 있었으니까요. 사람만 바뀌면 편해질 줄 알았던 자리에는 새 사람과의 새로운 어려움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자리를 옮겨도 제 습관과 생각까지 두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무조건 참고 머무는 것이 답이라는 뜻은 아닐 겁니다. 떠나야 해결되는 문제도 분명히 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도 곰배령에서 평생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방송 이후 영희 씨는 제주에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2016년 공개된 역자 소개에는 곰배령과 제주를 오가며 지낸다고 적혀 있고, 이후 작가 소개에는 제주로 옮겨 유기농으로 귤농사를 지었다고 나옵니다. 최근 소개에는 ‘몇 해 동안 귤농사를 지었다’고 적혀 있어 현재도 농사를 계속하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만 번역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2026년 출간된 《농업 고수》에도 정영희 씨가 번역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방송에서 산골 생활 틈틈이 일본어 책을 펼쳤던 일이 제주에서도 이어진 셈입니다.
곰배령에서 제주로 자리를 옮긴 근황을 보니 영희 씨가 했던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습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잘 지낸다는 말은 한곳에 영원히 머물러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에 있든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살아간다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이미 충분했던 저녁
영희 씨의 말을 듣고 제 하루도 한번 둘러봤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의 평범한 동선을 짚어 봤는데, 크게 모자란 데가 없었습니다.
요즘처럼 한창 더운 때 냉장고에서 참외나 수박을 꺼내 먹는 것도 너무 좋고 아니면 시원한 물 한 잔만 마셔도 충분합니다.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걸 굳이 확인해 본 적이 없었던 겁니다.
이렇게 방송 한 편을 보고난 마음을 글로 옮기는 시간도 요즘 제 낙 중 하나입니다. 방송을 보고, 문장을 쓰고, 다 쓴 글을 다시 한번 읽어 보는 정도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즐거움에도 돈은 거의 들지 않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한 저녁이고요.
방송에는 하루 일을 마친 두 사람이 난로 앞에 나란히 앉아 불을 쬐는 장면이 나옵니다. 양말을 말리다 태워 구멍이 났다고 둘이 웃습니다. 곰배령의 겨울은 기온이 영하 25도까지 떨어졌지만, 부부의 난롯가는 전혀 춥지 않아보였습니다. 제게 없는 것 보다 지금 가진 것을 더 자주 들여다보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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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KBS 인간극장 - 여기에 사는 즐거움 (2012. 2. 13. ~ 2. 17. 방송)
- 연합뉴스 - KBS 인간극장 ‘곰배령에 사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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