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가 자꾸 딴 생각이 났습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관식이가 애순이에게 꽃핀을 사주던 장면이요. 말은 툭툭- 던지는 사람인데, 꽃핀 하나에 마음이 다 담겨 있잖아요. 가거도 재원 씨가 뒷산에서 이름 모를 야생화를 꺾어 선미 씨 손에 쥐여주는 장면을 보는데, 그 모습이 딱 겹쳤습니다. "향이 너무 좋아서 집사람한테 맡아보게 하고 싶었다." 마음 씀씀이가 참 다정한 재원 씨입니다..
또 하나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습니다. 선미 씨가 정성껏 만든 수박화채를 재원 씨가 퍼담는데, 자신의 그릇보다 아내 그릇을 먼저 채워줍니다. 말은 없습니다. 그냥 먼저 담아줍니다. 말보다 행동으로 마음을 전하는 사람, 재원 씨는 그런 사람입니다.
없는 것이 많은 섬, 그래서 더 귀한 일상
가거도에는 없는 것이 많습니다. 피자 가게도, 치킨집도, 미용실도, 병원도 없습니다. 수박 하나를 먹으려면 목포 과일가게에 전화를 걸어 아침 배편에 보내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피자는 주문하고도 하루를 꼬박 기다려 선착장에서 찾아와야 하고, 도착한 피자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습니다. 선미 씨는 그 피자를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치킨은 다시 튀겨 식탁에 올립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살짝 뜨끔했습니다. 저는 도시에 살면서도 배달이 10분만 늦어도 조바심이 나는 사람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안 오면 짜증이 나고, 와이파이가 잠깐 끊겨도 하루가 다 꼬인 기분입니다. 그런데 선미 씨는 하루 넘게 걸려 식어버린 피자를 받아 들고도 짜증 한번 내지 않습니다. 다시 데우고, 다시 튀기고, 그걸로 끝입니다. 불평이 아예 없는 겁니다.
저라면 저 정도 불편을 견디며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모든 게 갖춰진 도시에 살면서도 사소한 것 하나만 어긋나면 바로 힘들어지는 사람인데, 선미 씨는 없는 것투성이인 섬에서 오히려 불평 없이 그 삶을 받아들이고 즐기며 살아갑니다. 편리함과 마음의 여유는 별개라는걸, 저는 이번 인간극장에서 배웠습니다. 똑같은 하루 24시간인데 누구는 사소한 불편에도 무너지고 누구는 훨씬 큰 불편을 웃으며 받아들입니다. 그 차이가 사는 곳 보단 마음가짐의 문제라는 걸, 저는 이 부부를 보며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괜히 반성이 됐습니다.
세탁기가 고장 나도 수리기사는 한 달 뒤에야 들어온다고 합니다. 선미 씨가 이리저리 살펴보다 결국 손을 놓는 장면에서는 저도 허탈했습니다. 며칠 뒤 재원 씨는 부모님이 오시는 배편에 새 세탁기를 실어 보냅니다. 선착장에서 상자를 받아 드는 선미 씨의 표정을 보며, 이 사람들에게 새 세탁기가 얼마나 큰 선물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는 소매를 잘라 나시로 만들고, 20년 넘은 슬리퍼는 바늘로 꿰매 신습니다. 귀한 것들 사이에서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가 봅니다. 저는 너무 쉽게 버려온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풍 앞에서, 더 단단해지는 섬사람의 삶
태풍이 가거도로 향했습니다. 항구는 이미 텅 비어 있었습니다. 배들은 모두 흑산도로 피항했고, 재원 씨는 유류통을 묶고 차를 고정한 뒤 고양이 목줄을 풀어줬습니다. 폭풍이 거세지면 스스로 도망칠 수 있도록. 화채를 아내에게 먼저 퍼주던 사람이, 고양이 목줄도 먼저 풀어주는 사람이구나.
2000년 태풍이 가거도를 덮쳤을 때 방파제가 두 동강 나고 수십 척의 배가 파손됐다고 합니다. 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자연에 함부로 맞서지 않습니다. 버티려 하기보다 미리 비켜줍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아침, 재원 씨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도 고양이와 염소였습니다. 모두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표정을 짓습니다. 그날 민박에 발이 묶인 손님들에게 선미 씨는 파전을 부쳐 막걸리 한 잔을 내어줍니다. 휴가를 망친 손님들을 위한 위로였습니다.
떠남과 남음, 부모의 마음
가거도에는 고등학교가 없습니다. 첫째 남주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육지로 나가야 하고, 둘째 나리도 언젠가는 같은 길을 가야합니다. 독실산을 함께 오르던 날, 재원 씨가 큰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고등학교는 어디로 가고 싶니?" 남주는 서울 외할머니 댁 근처로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재원 씨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저는 그 침묵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선미 씨는 서울에서 자랐습니다. 가거도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재원 씨를 따라 이 섬으로 들어온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습니다. 친정 엄마가 보고 싶고, 엄마가 끓여주는 우렁된장찌개가 먹고 싶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친정에 갈 수 있는데도 이런저런 핑계로 잘 안 가게 됩니다. 정작 가고 싶어도 배 시간과 뱃삯을 계산해야 하는 선미 씨를 보면서, 마음만 먹으면 되는 제 처지가 괜히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방학 동안 남주와 나리가 둘이서만 서울 외할머니 댁에 다녀오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착장에서 배를 바라보는 선미 씨 얼굴을 보며 저도 마음이 쓰라렸습니다. 외할머니는 손녀들을 꼭 안아주며 말했습니다. "딸을 보낼 때마다 가슴이 아파서 울었다." 짧은 말이었지만 마음에 오래 남는 말이었습니다.
2026년 현재 근황
인간극장 〈가거도 내 사랑〉이 방송된 지도 벌써 16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남주와 나리도 지금은 어른이 되었겠지요. 재원 씨와 선미 씨는 여전히 가거도에서 살아가고 있을지, 방송에서 운영하던 섬누리 민박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확인해 보니 두 분은 지금도 ‘가거도 섬누리 스테이’를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세상의 끝처럼 먼 가거도는 부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곳이었습니다. 아직도 그곳에서 두 사람의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참 반가웠습니다. 가거도의 거센 바람 속에서도 서로를 먼저 챙기던 부부의 다정한 모습이 한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가거도 섬누리 스테이: https://sumnur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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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KBS 인간극장 - 가거도 내 사랑 (2010. 8. 30. ~ 9. 3.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MCqXqWNqR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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