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다니는 회사에는 50대 커플 한 쌍이 있습니다.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가볍게 만나는 사이도 아니어서 서로의 가족 대소사까지 챙깁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좀 낯설었습니다. 그 나이에 결혼 없이 연인으로 지낸다는 게 어떤 그림인지 잘 그려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인간극장 '친구처럼, 때로는 연인처럼'을 보면서 딱 그 두 분 같아서 반가웠습니다. 낯설었던 그림이 방송 닷새 동안 조금씩 선명해졌습니다.
2021년 4월에 방송된 이 편의 주인공은 전남 무안의 도예가 박종현 씨와 목포에 사는 박미나 씨입니다. 두 사람은 8년째 연인이지만 부부는 아닙니다.
주중에는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생활을 하고, 금요일이 되면 미나 씨가 두 손 무겁게 무안의 공방으로 옵니다.
사부님과 매니저
두 사람은 서로를 사부님, 매니저님이라고 부릅니다. 연인이라는 말 대신 도반이라는 말을 꺼내고, 그게 더 편하다고 웃습니다.
30대 후반에 사별하고 혼자 세 딸을 키워 낸 미나 씨는 아이들이 다 자리를 잡자 맥이 풀리듯 우울감이 찾아왔고, 그 무렵 차 한잔 마시러 들른 공방에서 종현 씨를 만났습니다.
결혼으로 지금까지의 삶을 통째로 바꾸는 대신 두 사람은 각자의 시간을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딸들은 종현 씨를 엄마의 동반자로 받아들였습니다.
회사의 그 커플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 것도 이 대목에서였습니다. 두 분은 생활비를 반반씩 내고, 서로의 돈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시댁도 처가도 없으니 고부갈등이 생길 자리가 없고, 양가 부모님이 두 사람 사이에 참견할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상대 가족의 경조사는 꼬박꼬박 챙깁니다.
언젠가 그분이 그러더군요. 무거운 책임감이 없어서 오히려 관계가 좋다고요.
책임이 없다는 게 성의가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의무로 오는 금요일과 마음이 나서 오는 금요일은 같은 요일이어도 무게가 다릅니다.
생각해 보면 부부 사이의 갈등이 정작 두 사람 바깥에서 시작되는 경우를 저는 여럿 봤습니다. 명절, 시댁, 돈 문제처럼 당사자들 마음과 상관없이 밀려오는 것들이요.
이 두 커플은 그 바깥을 처음부터 접어 두고, 두 사람 사이의 일만 두 사람이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형태가 누구에게나 답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관계의 무게와 규칙을 남이 정해 준 대로 받지 않고 두 사람이 직접 정했다는 점만큼은, 결혼을 했든 안 했든 배울 만한 대목이었습니다.
서른다섯에 뛴 심장
종현 씨는 직장을 다니다 서른셋에 그만뒀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떠난 여행 끝에 물레를 처음 봤고, 흙덩이가 돌며 컵이 되고 접시가 되는 걸 보는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고 합니다.
서른다섯에 도예과에 들어갔고, 분청사기에 좋은 황토를 찾아 연고도 없는 무안으로 내려와 버려진 축사를 사서 20년 가까이 손수 고쳤습니다. 지금의 도연가마입니다.
심장이 뛰는 일을 뒤늦게 만난다는 게 어떤 건지, 저는 요즘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이 블로그가 저한테 그렇습니다. 인간극장을 한 편씩 보고 리뷰를 쓰기 시작하면서, 저는 매주 남의 인생을 통해 제 삶을 천천히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글 한 편을 쓰려면 방송만 봐서는 안 되고 제 기억을 뒤져야 하는데, 그때마다 잊고 지내던 장면들이 딸려 나옵니다. 동생과 방을 나눠 쓰며 싸우던 시절이 나오고, 힘들었던 해에 곁을 지켜 준 사람들이 나옵니다. 쓰기 전의 저와 쓰고 난 뒤의 저는 같은 기억을 갖고도 조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종현 씨가 흙을 빚어 자기 삶의 모양을 만들어 간다면, 저는 남의 삶을 읽으며 제 삶의 모양을 다듬어 가는 중입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쓰는 글이라 속도는 느립니다. 한 편에 며칠씩 걸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느린 속도가 싫지 않습니다.
종현 씨가 가마의 열이 식기를 사흘씩 기다리듯, 기억에도 뜸이 들어야 꺼낼 수 있는 것이 있더라고요. 시작이 늦었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습니다. 종현 씨의 물레도 서른다섯에 처음 돌기 시작했으니까요.
반만 나와도 고맙다는 말
방송 내용 중 달항아리가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완성을 눈앞에 둔 작품을 실수로 망가뜨리고도 종현 씨는 또 만들면 된다며 넘어갑니다.
가마에 여섯 개를 넣어 세 개가 살아 나온 날에는 반이나 나와 줘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위아래를 따로 빚어 하나로 붙이는 달항아리는 원래 성공률이 낮은 그릇이라고요.
저는 그 말이 도자기 얘기로만 들리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꼭 저 달항아리 같았거든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반쪽을 그대로 지닌 채 주말마다 하나로 포개지는 방식이요.
상대의 전부를 요구하지 않으니 절반만 겹쳐도 충분히 고마운 사이가 됩니다. 여섯 개를 다 살리겠다고 들었다면 종현 씨는 가마 앞에서 무너지는 날이 더 많았을 겁니다.
회사의 그 커플이 좋아 보였던 이유도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각자 자기 몫의 삶을 절반씩 남겨 두었기 때문에, 나머지 절반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관계에 전부를 걸라는 말은 많이 들어 봤어도, 절반을 남겨 두라는 말은 어디서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 눈으로 확인한 오래가는 관계들은 후자 쪽이 많았습니다.
젊을 때는 사랑이라면 전부를 걸어야 한다고 배웠고, 절반을 남겨 두는 건 계산처럼 보였습니다. 지금은 다르게 읽힙니다. 남겨 둔 절반이 있어야 상대가 기대 올 때 같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두 커플이 각자의 방식으로 그걸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방송 속에서 미나 씨는 할 일을 마치면 저는 퇴근해야죠, 하며 목포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종현 씨는 가고 나면 서운하지만 시원한 것도 있다고, 기약할 다음이 있어 좋다고 말합니다.
배웅하고 돌아서는 그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월요일 아침이면 회사의 그 두 분도 각자의 자리로 출근합니다. 그리고 금요일이 오면 또 서로에게 갈 겁니다. 미나 씨가 두 손 무겁게 무안의 공방으로 가듯이요.
박종현 씨의 근황
방송 이후의 소식도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종현 씨는 지금 '도연가마tv'라는 유튜브 채널을 직접 운영하며 무안 공방의 일상과 작업을 꾸준히 올리고 있었습니다. 방송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여서 반가웠습니다. 도연가마tv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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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KBS 인간극장 - 친구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2021. 4. 26. ~ 4. 30.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tFyJ_YbBpOo&t=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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