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제시카와 동섭 씨는 달라도 너무 달라’ 리뷰|시장이 고향이 되는 법

세화 오일장 날이면 제시카는 장날 전날 밤부터 뭐 살까를 고민합니다. 시장을 놀이터처럼 드나드는 이 미국 여자의 매력은 시장 상인들도 알아봤습니다. 냉장고 바지를 사고, 아메리칸 블루라는 이름에 반해 꽃 모종을 예약하고, 지나가다 할머니 손에 쌈채소를 쥐여 드립니다. 

주고받고 하는 사이에 제시카는 어느새 이 시장의 사람이 됩니다. 미국 테네시에서 제주 세화리까지 온 이방인이 5일장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얼굴을 알아보는 사이

저도 전통시장을 좋아합니다. 동네에 복조리시장이 있는데, 거길 가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느낌이에요. 거기에 단골 가게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전기구이집입니다. 기름 빠진 오리구이가 너무 고소하고 맛있구요, 누룽지 찹쌀 닭구이도 감칠맛 폭발하죠. 대기 줄이 길어서 계산부터 해놓고 장을 다 본 뒤 마지막에 받아옵니다. 얼마 전에 생긴 장어집도 벌써 단골이 됐습니다. 싱싱하고 통통한 장어를 고르면 오븐에 초벌해줘서 집에와서 굽기도 편하고 맛도 좋습니다.

이 두 가게에 가면 “어, 또 오셨네요. 오늘도 같은 걸로 드릴까요?”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만 아는 사이인데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을 풀어줘요. 마트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말이니까요. 전기구이집은 대기가 길어도 가고, 장어집은 생긴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단골이 됐습니다.

단골이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물건을 사러 가는 게 아니라 그 “오셨네요”라는 한마디를 들으러 가는 거죠.

제시카도 그걸 아는 사람입니다. 시장에 다녀오면 에너지가 차오른다고 했습니다. 물건을 사고 안부를 묻고, 가끔은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기도 합니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 낯선 땅도 조금씩 자기 동네가 되는 것이겠지요.


달라도, 두 사람이 맞물리는 방식

제시카는 멀티플레이어입니다. 주문을 받고 버거를 만들고 서빙까지 홀과 주방을 동시에 누빕니다. 반대로 동섭 씨는 한 번에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불 앞에서 패티 굽는 일과 설거지만 전담합니다. 그래서 좁은 주방에서 자주 부딪히고 싸웠습니다. 주방을 넓혀 조리대를 새로 들이고 나서야 동선이 겹치지 않게 됐습니다.

성격도 다릅니다. 제시카는 준공 허가 문제가 생기자 직접 구청으로 달려가 담당자 앞에서 세 번이나 미뤄진 사정을 털어놓습니다. 반면 동섭 씨는 혼자 해결하려다가 계속 뺑뺑이를 돕니다. 일 처리 방식도, 속도도 다릅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10년을 같이 살았고, 싸워도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제주에 처음 왔을 때 에어컨도 없어 화장을 하다 땀에 지워지면 울었다는 제시카를 동섭 씨는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빚을 지고, 가게가 망하고, 준공이 밀리고, 제시카가 아프고. 그때마다 두 사람은 싸우고 또 붙어 있었습니다. 

한번은 제시카가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며 비행기 예약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때 동섭 씨는 자신을 믿고 한 번만 더 가보자며 제시카를 붙잡았습니다. 이후 완공된 집과 다시 문을 연 가게를 보니 그 ‘한 번만’ 더 믿어보길 다행인 것 같습니다. 

국적이 달라서 싸우는 게 아닙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라서 싸우는 겁니다. 모든 부부가 그렇듯, 차이를 없애려는 노력보다 인정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결혼 생활입니다.


쌓아 올린 것, 10년의 벽돌

동섭 씨는 건축가도 목수도 아닌데 제시카를 위해 10년 동안 집을 지었습니다. 돈이 생기면 자재를 사고, 돈이 떨어지면 멈추고, 다시 벌면 다시 시작했습니다. 1층에 수제버거 가게를 열었고, 이번에 2층을 게스트하우스로 만드는 공사를 마쳤습니다. 

타일도 동섭 씨가 직접 붙이고, 제시카가 닦았습니다. 현관문이 있던 자리에 나무 틀을 짜 넣어 새로 꾸몄습니다. 그래서 이 집의 모든 벽과 모서리에는 두 사람의 손때가 배어 있습니다.

영업을 재개하는 날 아침, 동섭 씨는 긴장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제시카가 음악을 틀고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동섭 씨도 끌어당겨 같이 몸을 흔들었습니다. 웃으면서 가게 문을 열었습니다. 제시카가 없었다면 이 집이 지어졌을까 싶고, 동섭 씨가 없었다면 제시카가 제주에 남았을까 싶습니다.

동섭 씨는 캠핑장에서 제시카에게 편지를 건넸습니다. 말로는 다 못 한 마음을 적었습니다. 제시카는 그를 "실수하면 고치려고 누구보다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99%의 사람은 포기하는데, 이 사람은 고친다고요. 그 말이 이 부부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문장이었습니다.


방송 이후, 다시 오일장으로

2026년 1월 KBS ‘연중기획 하모니’가 두 사람을 다시 찾았습니다. 결혼 13년 차가 된 제시카와 동섭 씨는 여전히 제주 동쪽 마을에서 미국식 수제버거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쉬는 날이 되자 제시카는 친구 니카와 다시 제주 오일장으로 향했습니다. 2021년 장날 전부터 무엇을 살지 고민하던 제시카가 5년 뒤에도 시장을 돌아다니며 겨울 별미를 맛보고 있었습니다.

저도 복조리시장에 가면 “오늘도 같은 걸로 드릴까요?”라는 말을 듣습니다. 요즘은 그 말을 들으면 물건만 사서 돌아오는 기분이 아닙니다. 이름은 몰라도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씩 늘어날 때, 시장은 조금씩 자기 동네가 되는가 봅니다.

제주 테네시테이블: 제주 제주시 구좌읍 세화11길 11 1층


▶ 함께 읽으면 좋은 인간극장 이야기

인간극장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리뷰|아이의 속도를 기다려주는 집

인간극장 '내 아내는 보스' 리뷰|아내가 남편의 사수가 된 대동물 수의사 부부



참고

KBS 인간극장 - 제시카와 동섭 씨는 달라도 너무 달라 (2021년 7월 12일 - 7월 16일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4HZvFJGPdnM

KBS 연중기획 하모니 – 결혼 13년 차 제시카·동섭 씨 부부 

https://www.youtube.com/watch?v=BES70FCOW5Q



Post a Comment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