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옷장 속 옷을 전부 꺼내 입어보시더니,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에는 손톱과 발톱에 매니큐어까지 바르셨습니다. 칠순이 넘은 저희 엄마 이야기입니다.
인간극장 ‘아흔일곱 엄마의 소풍’을 보다가 그날의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방송 당시 아흔일곱이던 배일엽 할머니가 외출할 때마다 향수를 뿌린다는 대목에서였습니다.
딸이 8개월 만에 알게 된 향수
전남 고흥에 사는 배일엽 할머니는 열 명의 자식을 키우며 평생 갯벌과 밭에서 일했습니다. 딸 이정진 씨는 어머니께 세상 구경을 시켜드리려고 방송 당시 기준 4년 전 캠핑카를 마련했습니다.
방송 전해 겨울에는 어머니의 담석증을 알게 됐습니다. 수술 후 부쩍 약해진 어머니를 혼자 둘 수 없었던 정진 씨는 고향 집에 내려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8개월을 곁에서 지내고서야 딸은 어머니가 나들이를 나갈 때마다 향수를 뿌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늘 같은 반찬만 드셔도 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새로운 음식을 맛있게 드셨고, 예쁜 옷과 구두를 챙겨드리자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좋아했습니다.
정진 씨는 그제야 ‘엄마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솔직해서 좋았습니다. 자식에게 엄마는 오랫동안 ‘엄마’로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에 가고 싶은지보다 건강은 괜찮은지, 식사는 했는지를 먼저 묻게 됩니다. 걱정은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의 취향은 모르는 겁니다.
칠순 엄마의 여행 준비
이 대목에서 저희 엄마가 국민학교 동창들과 1박 2일 횡성 여행을 준비하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기 일주일 전부터 무슨 옷을 입을지 옷장 속 옷을 하나씩 꺼내 입어보고, 가방과 모자, 신발을 고르느라 며칠을 보내셨습니다.
친구들과는 아침 메뉴까지 미리 정했습니다.
“그럼 순자야. 너는 애호박이랑 양파, 나는 감자랑 파, 경순이는 쌀이랑 된장 가져온다 했지? 고기랑 라면은 가다가 사고. 또 뭐 있지?”
전날까지 통화로 역할을 나누시더니, 당일 아침에는 손톱과 발톱에 매니큐어까지 바르고 나가셨습니다. 일흔이 넘어도 소풍을 앞둔 마음은 이렇게 들뜰 수 있다는 걸 저는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배일엽 할머니의 향수와 저희 엄마의 매니큐어는 조금 닮아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외출을 기다리고 자신을 꾸미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식인 제가 그런 마음을 자주 물어보지 않았을 뿐입니다.
곁에 살아야 보이는 것들
정진 씨가 어머니와 살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향수만이 아니었습니다. 굽은 허리로 설거지하기 힘든 어머니를 위해 싱크대 앞에 발 받침을 놓았고, 아무나 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나무 대문도 달았습니다.
여행을 다니고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효도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같이 살아보니 어머니가 매일 겪는 작은 불편이 보였던 겁니다.
이 장면을 보며 가까이 있다는 것과 자세히 보는 것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먼저 불편하다고 말하지 않았고, 딸은 함께 생활하기 전까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거창한 계획보다 찬물에 손을 넣지 않게 하는 일, 몸을 덜 굽혀도 되게 만드는 일이 먼저 필요할 때도 있었습니다.
일터였던 갯벌이 풍경이 된 날
할머니에게 갯벌은 오랫동안 구경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밀물이 목 가까이 차오를 때까지 갯것을 잡고, 밤에는 굴을 까서 시장에 내다 팔아야 했던 일터였습니다.
그런 할머니가 딸과 떠난 바다 여행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이런 경치는 처음 본다고 기뻐했습니다. 평생 오가던 곳인데도 그 위로 지는 해를 바라볼 시간은 없었던 겁니다.
딸들이 엄마들을 너무 몰랐던 것 같네요. 저도 어릴 때는 가족이 함께 여행을 다녀오면 모두가 똑같이 여행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출발 전부터 먹을 것을 챙겼고, 도착해서는 밥을 차렸으며, 돌아와서는 다들 피곤해서 널부러져 있는데도 엄마는 짐을 풀고 빨랫감을 정리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나들이였지만 엄마에게도 정말 나들이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평생 드나든 갯벌에서 아흔일곱이 돼서야 노을을 처음 보았다는 배일엽 할머니의 말이 쉽게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에서 할머니의 고된 삶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정리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제라도 일하던 자리에서 잠시 멈춰 서서 노을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쓰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여행은 언제냐고 물었습니다. 벌써 다음 달에 갈 계획을 세우고 계시더라고요. 시간 내서 울엄마 옷 한벌 사드리러 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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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KBS 인간극장 - 아흔일곱 엄마의 소풍 (2021. 8. 30. ~ 9. 3. 방영)
https://www.youtube.com/watch?v=R_v5xeXir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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