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사랑하는 희에게' 리뷰|“나 간다”는 말에 또렷해진 눈빛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실 때 병문안을 갔던 날이 있습니다. 침대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이런저런 말을 걸었지만 할머니는 저를 알아보지 못하셨습니다. 눈을 마주쳐도 낯선 손님을 보는 표정 그대로였습니다. 이름을 말해도, 어릴 때 이야기를 꺼내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딱히 기대는 없었고,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올 생각이었습니다.

“할머니, 나 간다. 건강하셔야 해요.”

그 말을 듣자마자 할머니 눈빛이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저를 알아보시고는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아이고, 야야~ 어째왔나?” 그러고는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왔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 몇 분이 계속 떠오릅니다. 왜 하필 그 말에서, 그 순간에 기억의 문이 열렸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그 몇 분이 그렇게 소중한 시간인 줄 몰랐습니다. 병실을 나서면서도 그저 오늘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야 그런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2021년 10월 방송된 인간극장 〈사랑하는 희에게〉를 보면서 그 병실 풍경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태안에서 52년을 함께 살아온 이은형 씨와 김준희 씨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아내 준희 씨는 4년 전 치매 진단을 받았습니다. 한때는 딸들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증상이 심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잠깐만 보이지 않아도 신발조차 신지 못한 채 맨발로 마당까지 뛰쳐나가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방송이 촬영되던 무렵에는 증세가 한결 안정되어 고추밭 일도 조금씩 거들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는 나날이었고, 은형 씨는 아내가 언제 다시 멀어질지 몰라 늘 곁을 맴돌았습니다.


잠깐 맑아지는 눈빛

방송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건 준희 씨가 딸들은 못 알아보면서도 아들만은 알아봤다는 대목이었습니다. 동생들 얼굴을 보고도 “너 누구지?” 하고 되묻던 사람이 아들 앞에서는 달랐습니다. 딸들도 그 사실이 신기하다고 말했습니다.

오랜만에 손자가 찾아온 날에는 주머니에 숨겨 둔 동전을 하나하나 꺼내 손자의 손에 쥐어 주기도 했습니다. 평소에는 그 동전을 아까워하며 좀처럼 내놓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기억이 어떤 얼굴이나 말투, 특정한 문장 앞에서만 잠깐 문을 열기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이 장면들을 보면서 할머니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사진첩을 꺼내 보는 장면도 그랬습니다. 사진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는데, 잊어버릴까 봐 딸들이 미리 붙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엄마가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은 종이 한 장에 담겨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래 반복해 온 인사말의 리듬이나 손을 흔드는 익숙한 움직임이 할머니의 기억 어딘가에 닿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할머니가 저를 알아봐 주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는 아직도 그 짧은 순간을 오래 붙잡고 있습니다.


손끝에 남은 기억

말로 표현되는 기억은 자주 끊겼지만, 손이 하는 일은 조금 달랐습니다.

준희 씨는 아흔일곱 살 시어머니에게 바늘귀를 꿰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눈이 어두운데도 단번에 실을 꿰었습니다. 눈은 어두워졌어도 평생 익혀 온 바느질만큼은 손끝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준희 씨 자신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남편 생일날 아침, 4년 만에 처음으로 마른 미역을 물에 불리고 국을 끓였습니다. 간을 맞추는 손과 미역을 볶는 순서 하나하나가 몸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방향을 몰라 헤매던 사람이 그날은 정확한 음력 날짜까지 기억해 냈습니다. 은형 씨는 국을 받아 들고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손수 끓여 준 생일 미역국은 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절구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거쳐 3대째 쓰고 있다는 느티나무 절구에 곡식을 찧는 동작은 무척 익숙해 보였습니다. 말로 표현되는 기억과 몸에 새겨진 기억은 서로 다른 서랍에 들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도 마지막까지 제 이름은 가물가물해하셨지만, 인사하는 말투나 손을 잡는 방식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아이고, 야야~” 반가운 사람이 오면 손을 꼭 잡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었는데,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눈물이 막 쏟아졌습니다. 

밥 짓는 법을 잊지 않아 저녁마다 손수 상을 차리던 준희 씨가 어느 날에는 밥솥 앞에서 뚜껑을 잠그는 법조차 떠올리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습니다. 같은 사람 안에서 잘되는 날과 안 되는 날이 이렇게 오갈 수 있다는 게,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매일 새로운 시험 같았을 겁니다.


다시 쓰는 편지

은형 씨는 52년 전 친구 집에서 우연히 본 사진 한 장에 반해 먼저 편지를 썼던 사람입니다. 태안의 가난한 집 장남이었던 그는 편지로만 1년 반을 매달렸고, 부잣집 딸이었던 준희 씨는 다섯 번의 만남 끝에 그 편지에 답하듯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그 시절 받은 편지들을 준희 씨는 한 통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내가 예전 같지 않은 지금, 은형 씨는 다시 편지를 씁니다. 초안만 써 봤다며 머쓱해하던 그 편지에는 고생만 시켰다는 후회와, 그럼에도 앞으로 계속 곁에 있어 주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문에는 새 문패를 달았습니다. 이제까지 문패에는 남편 이름만 걸려 있었지만, 처음으로 아내의 이름도 나란히 새겨 넣었습니다. 50년 넘게 이 집의 안주인으로 살았으면서도 정작 문패에는 이름 한 번 올려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는 “누가 보면 웃겠다”며 웃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나란히 앉아 있던 두 사람의 자세가 오래 남았습니다.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몸짓이 아니라 그저 옆에 있으려는 태도였습니다.

젊었을 때는 밥상도 차려 주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프라이팬 앞에 서서 갈치 굽는 법을 처음 배우고, 어머니의 밥상까지 손수 차려 냅니다. 50년 넘게 하지 못한 말과 해 보지 못한 일들을 뒤늦게 하나씩 해내는 모습이었습니다.

병문안을 다녀온 뒤로 저는 할머니를 자주 생각합니다. 알아봐 주신 그 몇 분이 전부였다는 걸 알면서도, 그 몇 분을 오래 붙잡고 있습니다. 손을 잡던 힘과 눈을 마주치던 각도, 짧게 나눴던 대화까지 하나하나 다시 꺼내 봅니다.

그날 이후로 병실에 갈 때마다 저는 예전만큼 긴장하지 않았습니다. 알아보시든 못 알아보시든, 그저 곁에 앉아 있는 시간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조금씩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은형 씨가 쓰던 편지의 마지막에는 기억이 흐려져도 곁을 지키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문 앞에 나란히 걸린 두 사람의 이름을 생각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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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KBS1 인간극장 - 사랑하는 희에게 (2021년 10월 4일~10월 8일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1NozHdS5L1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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