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일시장 5일장이 서는 날이었습니다. 박문영 씨는 빵집 앞치마를 두른 채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37년째 그 자리를 지켜온 대장장이, 오래된 화덕 앞에서 쇠를 두드리는 손. 뷰파인더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파리에서 사진을 전공한 문영 씨가 빵집 주인이 됐다가 다시 카메라를 잡은 장면이었습니다.
처음엔 그냥 지나쳤는데, 잠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당연했습니다. 빵집이 없었으면 저 할머니 앞에 저렇게 자연스럽게 서 있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 거리는 사진가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웃과 이웃 사이의 거리였고, 빵집이 그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길
문영 씨는 파리에서 사진을 전공했습니다. 귀국 후 아내 아마릴리스 씨와 함께 스튜디오를 운영했고,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 게 오래된 꿈이었어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거창한 이야기보다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고요.
그 스튜디오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뒤, 아내가 프랑스에서 배워온 제빵 기술로 경기도 시흥의 낡은 시장 골목에 빵집을 냈습니다. 한두 달만 도와주고 다시 사진 일로 돌아가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 혼자 하루 종일 서서 반죽하고 굽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새벽 다섯 시도 안 돼 일어나 빵집으로 나가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한 달이 일 년이 됐습니다. 방송에서 그는 사진가의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잠시 접어뒀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솔직하게 들렸고, 동시에 조금 쓸쓸해 보였습니다. 빵집은 그가 원해서 들어간 곳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5일장 날 그가 대장간 앞에서 셔터를 누르는 장면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빵집에서 보낸 시간은 문영 씨를 시장 사람들의 이웃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물전 할머니는 “뭐 하러 찍어”라며 면박을 줬지만 자리를 피하지 않았어요. 사진가로만 찾아갔다면 카메라 앞에서 얼굴이 굳었을텐데 매일 보는 빵집 주인 앞에서는 편안합니다. 문영 씨가 얻은 것은 촬영 장소라기보다 이웃에게 허락받은 거리였습니다.
사진을 잠시 접기 위해 들어간 문이, 사진가가 시장 골목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경로가 됐습니다. 그가 오래 찍고 싶었던 것들이 바로 그 골목 안에 있었고, 빵집이 그 안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가장 돌아가는 길처럼 보였던 게 사실은 가장 깊이 들어가는 통로였습니다. 방송에서 그는 일상의 기록을 남기는 게 소중한 작업이라고 했는데, 빵집이 바로 그 일상 안에 그를 심어놓았습니다.
빵집이 만든 이웃의 거리
그 거리는 문영 씨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릴리스 씨는 매일 빵을 구우며 방앗간과 화장품 가게를 오갔고, 시장 상인들과 음식을 나누고 수다를 떨었습니다. 프랑스식 크루아상을 파는 가게였지만 그곳에서 오간 것은 빵만이 아니었습니다. 부부가 골목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한 시간이 빵집과 시장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좁혔습니다.
크루아상 하나를 만들려면 전날부터 버터를 준비하고, 반죽을 접고 또 접어 켜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마릴리스 씨는 손목터널증후군을 앓으면서도 반죽하고 철판을 들었습니다. 까눌레 만들기에 두 번 실패하고도 세 번째 도전을 준비했고, 새로운 빵이 나오면 이웃들에게 먼저 맛을 보여줬어요. 빵집은 생계를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아마릴리스 씨 역시 그 일을 통해 시장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빵집이 들어선 뒤 방앗간도, 옆 가게도 조금씩 달라졌다고 했습니다. 지역 주민센터에서는 빵집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고 친정어머니의 작은 전시회를 열어줬습니다. 마을 카페에서는 이웃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기 시작했어요. 한때 쇠락해가던 골목에서 빵을 팔러 들어온 사람이, 그 골목이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됐습니다. 처음부터 골목을 살리러 온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습니다. 빵 굽는 일이 그 안에 완전히 들어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수익형 블로그로 시작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지금과 다른 이유로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수익형 블로그를 운영하려고 했어요. 상품 리뷰 글들을 올리면서 방문자 수와 클릭률을 신경 썼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인간극장을 보고 나서 뭔가에 이끌리듯 글을 썼습니다. 방송 이야기를 쓰다가 제 이야기가 나왔고, 제 이야기를 쓰다가 오래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다 쓰고 나서 보니 수익이랑은 거리가 먼 글이었는데 마음이 묘하게 몽글몽글 해지면서 기분이 좋았어요. 재밌었습니다. 그 뒤로 또 한 편 썼고, 또 한 편 썼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삶도 읽힌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어요. 이 글들을 쓰기 위한 블로그가 따로 하나 더 생긴 건 그래서입니다.
이 블로그 이름이 ‘삶을 읽다’인 건, 남의 삶을 보다가 내 삶을 읽게 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수익을 내보려고 시작한 블로그가 사람의 삶을 읽는 글을 쓰게 된 입구가 됐습니다. 처음에 원하던 문이 아니었는데 막상 열고 들어가 보니 더 오래 머물게 되는 곳으로 이어졌습니다.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제가 쓰고 싶었던 글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문영 씨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제가 상품 리뷰를 쓰다가 사람의 삶을 기록하는 블로그를 따로 만들었듯, 문영 씨도 빵집 일을 하다가 오래 찍고 싶었던 얼굴들을 만났습니다. 예상하지 않았던 길에서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을 발견했다는 점이 닮아 있지요.
어떤 문들은 처음엔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문입니다. 생활 때문에,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민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면 거기서만 보이는 풍경이 있습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 안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처음에 잃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더 가까워져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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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KBS 인간극장 - 아마 씨의 행복한 빵집 (2017년 5월 22일~5월 26일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chxvM6dNF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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