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손님이 한 명도 오지 않은 카페가 있습니다. 개업한 지 한 달, 그래도 허상국 씨는 매일 아침 문을 열었습니다.
간판을 보고 첫 손님이 들어오던 날, 그 얼굴에 번지던 미소를 저는 한참 바라봤습니다. 통영 앞바다가 마을 안쪽까지 스며드는 작은 어촌 풍화리, 그 끝자락의 풍경입니다.
서울대 사회과학대 수석 합격, 대기업 직원.남들이 보기에는 누구보다 안정적인 길을 걷던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왔을까 궁금했습니다. 그 선택은 남편이 아니라 아내에게서 먼저 시작됐습니다.
도시를 떠나 풍화리로 온 이유
아내 케이코 씨는일본 오사카 출신입니다. 한국으로 유학을 왔고, 서울대에서 선배인 상국 씨를 만났습니다. 졸업 후에는 유명 화장품 회사의 브랜드 매니저로 일하며 여러 나라를 오갔습니다.
그런데 첫 아이를 낳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일에 치여 사는 삶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콘크리트 숲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다고 결심했습니다. 남편을 설득했고, 회사일에 지쳐 가던 상국 씨도 아내의 뜻을 따랐습니다. 부부는 황희, 람희, 록희 세 아이를 데리고 통영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 친구 한 명이 떠올랐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고, 좋은 대학을 나와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들어가 친구들 모두가 부러워했던 친구입니다. 입사한 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 그 친구가 요즘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연봉은 스트레스값’이라고요.
친구는 새벽 다섯 시 전에 일어나 아침은 10분도 안 걸려 입에 밀어 넣고 출근합니다. 그나마 차에 자율주행이 있어서 운전 피로는 덜하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라고 합니다. 하루 종일 일에 파묻혀 야근을 하고, 퇴근해도 집까지 일을 가져옵니다. 주말에 잠깐 쉬다가도 일생각에 벌떡 일어나 노트북을 열어본다고 했습니다.
옷이며 가방이며 차며 다 좋은 브랜드고, 휴가는 해외 5성급 호텔로 가고, 항공편도 비즈니스 이상, 미슐랭 식당에도 꽤 자주 갑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솔직히 부럽기도 하고, 저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아보라고 하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서도, 명품 가방 이야기가 나오면 귀가 솔깃해지는 게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그런데 정작 친구 본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겁니다.
“요즘 내 삶에 내가 없다.”
방송에서 케이코 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매일 남편이 내려준 커피를 마시는 행복한 여자예요.”
전 세계를 오가며 일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아침이었습니다. 제 친구가 10분 만에 아침을 욱여넣고 출근하는 동안 케이코 씨는 남편이 내려준 커피를 천천히 마셨습니다.
서울에서 통영까지의 거리보다, 이 두 아침 사이의 거리가 훨씬 멀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삶이 더 좋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의 아침이 아주 다르다는 건 분명했습니다.
빈 객실과 우는 아이들 사이
풍화리 생활이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닙니다. 게스트하우스는 방이 비어 있는 날이 더 많고, 카페를 찾는 이도 드뭅니다. 아이 셋을 혼자 데리고 마트에 다녀오는 차 안에서 세 아이가 동시에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보는 저도 숨이 막혔는데, 운전대를 잡고 있던 케이코 씨는 어땠을까요.
어느 밤 케이코 씨가 말했습니다.
“먼저 얘기해 주면 얼마나 좋아. 30분이라도 봐줄 테니 쉬라든지.”
상국 씨는 어둠 속에서 한참을 서성였습니다. 빈말은 하기 싫고, 미안하다는 말도 쉽게 나오지 않는 밤이었습니다. 장모님은 딸을 보러 오셔서 한숨을 내쉬셨고, 아버지는 아들이 내려준 커피를 아무 말 없이 드셨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 장면들이 좋았습니다. 삶을 바꿨다고 해서 하루하루가 다 예쁠 수는 없으니까요. 제 친구의 고단함이 회사 책상과 노트북 앞에 있다면, 이 부부의 고단함은 빈 게스트하우스와 우는 아이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부부가 풍화리까지 내려온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스마트폰 화면보다 갯벌과 바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게를 잡고 문어를 구경하며 풍화리의 바람을 그대로 맞았습니다.
부러운 사람보다 고마운 사람
결혼기념일 아침, 상국 씨는 아내 몰래 만든 액자에 꽃을 꽂고 편지를 썼습니다.
“배고프지 않게 맛있게 먹으며 살겠습니다. 멋있는 집에서. 나쁜 놈이 오지 않게 잘 지키겠습니다.”
거창하지 않은 문장들인데 며칠이 지나도 자꾸 떠오릅니다. 아이들은 갯벌에서 게를 잡고, 바닷가에서 문어를 구경하고, 비바람 속 출렁다리를 건너며 웃습니다. 방송 당시 부부는 세 아이가 잔병치레 한 번 없이 자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상국 씨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부러운 사람이 되는 것보다 고마운 사람이 되는 게 낫다.”
반면 제 친구는 지금의 생활 방식이 자신에게 더 편하고, 결혼할 생각도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선택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상국 씨 부부가 풍화리를 선택했듯 친구는 친구대로 자기 자리를 선택한 거니까요.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 바닷가로 내려가고, 누군가는 도시에서 혼자만의 리듬을 지키며 삽니다. 어느 쪽이 맞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저 스스로에게는 물어보게 됩니다. 노트북을 덮지 못하는 주말과 커피 한 잔으로 열리는 아침, 나라면 어느 쪽을 고를까.
친구를 볼 때도, 이 부부를 볼 때도 부럽다는 마음과 ‘나는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번갈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방송을 다 보고도 어느 쪽을 고르겠다고 답하지 못했습니다.
방송 후에도 이어진 풍화리 생활
풍화리 편을 보고 나니 저도 언젠가 통영에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그 카페에 앉아 상국 씨가 내린 커피를 마시며 바다를 잠시 바라보고 싶습니다.
부부의 근황도 찾아봤습니다. 2026년 7월 현재 안트워프 게스트하우스는 객실 예약을 받고 있고, 커피숍과 조식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족 블로그에는 넷째까지 태어나 네 아이의 부모가 된 근황도 공개돼 있었습니다.
방송 당시에는 하루 종일 손님이 한 명도 오지 않는 날이 많았습니다. 간판을 보고 첫 손님이 들어오자 상국 씨는 감추지도 못하고 활짝 웃었습니다. 그곳이 11년이 지난 지금도 여행객을 맞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습니다.
통영에 가게 된다면 저도 그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셔보고 싶습니다. 방송 속 첫 손님이 앉았던 자리를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나갔을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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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KBS 인간극장 - 상국 씨가 풍화리로 간 까닭은 (2015. 8. 31. ~ 9. 4.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0ZYreXds9gs&t=9241s
안트워프 게스트하우스 블로그
https://blog.naver.com/cafeantwe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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