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수학 성적이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수학의 정석을 처음부터 다시 풀게 하셨습니다. 거의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뒤에도 아버지는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기본이 탄탄해야 응용문제도 풀린다면서 같은 개념을 몇 번이고 다시 풀게 하고, 심지어 그 개념을 저더러 직접 설명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손흥민 선수 아버지가 아들에게 화려한 기술 대신 기본기만 몇 년을 시켰다는 얘기를 들으니 수학의 정석 책이 바로 생각났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문제가 막히면 자연스럽게 기본으로 되돌아가는 습관이 생겼고, 그렇게 풀린 문제가 꽤 많았습니다.
이번 인간극장의 권태중 씨를 보면서 그 시절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강원도 원주의 한 재래시장, 20년 넘게 김치만두 하나로 문전성시를 이룬 가게. 아들 형도 씨에게 아버지가 가르치는 방식이 제 아버지와 꼭 닮아 있었습니다.
기본, 설거지만 3년
형도 씨는 9개월 차 수습사원입니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호텔 주방에서 일하다가, 아버지 뒤를 잇겠다며 만두가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권태중 씨가 아들에게 내린 첫 명령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설거지만 3년 해라"였습니다. 사장 아들이라는 특권을 앞세우기 전에, 손님보다 자신을 낮추는 법부터 배우라는 뜻이었습니다.
친구를 만나러 잠깐 나갔다 늦은 날엔 경고 카드가 붙고, 배달 시간을 어겨도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처음엔 저도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폐차장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젊은 시절 부부싸움 끝에 폐차장으로 차를 몰고 간 태중 씨가 그곳에 버려진 고무장갑 하나를 손에 쥐고 울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가정을 꾸리고 장사를 시작한다는 게 얼마나 치열한 일이었을지, 그 장면 하나가 다 설명해 주었습니다. 세상의 냉정함을 먼저 배운 사람이었기에, 자식만큼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을 겁니다.
설거지 3년은 아마 제가 풀었던 수학의 정석과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정답을 빨리 내는 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흔들려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저도 아버지가 너무하다고 생각했죠. 이미 아는 문제를 왜 또 풀어야 하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중에 정말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저는 그 지겹도록 반복했던 기본 공식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레시피보다 먼저 배추를 읽는 눈
이 방송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의외로 만두를 빚는 손보다 배추를 고르는 눈이었습니다. 봄배추는 물이 많아 절이는 시간을 확 줄여야 하고, 겨울 하우스 배추는 소금 양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형도 씨가 새벽시장에서 어렵게 구해온 배추를 아버지가 다시 퇴짜 놓는 장면에서 저는 잠시 웃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미세한 차이가 20년 단골을 만든 이유였습니다.
권태중 씨는 레시피를 외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재료를 읽는 사람이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저한테 개념을 스스로 설명해보라고 시켰던 것과 같은 이치였습니다. 공식의 모양만 외운 사람은 문제가 조금만 달라져도 막히지만, 원리를 이해한 사람은 다시 풀어낼 수 있습니다. 태중 씨에게 배추를 고르는 눈은 레시피에 적을 수 없는 기본이었을 겁니다.
지문이 닳을 때까지
이렇게 엄격한 아버지가 손녀 민정이 앞에서는 세상 다정한 할아버지가 됩니다. 배꼽 인사 한 번에 얼굴이 환해지고, 배추 작업 중엔 손도 못 대게 하던 떡을 손녀가 넣어주면 못 이기는 척 받아먹어요. 그 표정 하나로 저는 이 사람의 원래 성정을 알았습니다. 차갑기는커녕, 표현이 서툴렀을 뿐입니다.
제 아버지도 그랬습니다. 수학 문제집을 앞에 두고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지만, 제가 다 풀고 나면 꼭 어깨를 두드려 주셨지요. 엄격함과 다정함이 한 사람 안에 같이 있다는 걸 알게된 후론 아버지의 엄격한 방식도 좋아졌습니다.
20년 만에 처음 떠난 가족여행에서, 부자가 나란히 개울가에 앉아 물고기를 잡는 장면도 잊히지 않습니다. 형도 씨는 잡은 물고기를 도로 놓아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말로 가르친 적 없는데도 어느새 아들 손끝에 아버지의 방식이 스며 있었습니다.
형도 씨의 손톱은 설거지로 벌어지고, 아버지 태중 씨의 손엔 지문이 다 닳아 없어졌습니다. 형도 씨가 그 손을 보며 "나도 지문 없어질 때까지 살자"고 말하는 장면에서, 저는 제가 풀던 정석 문제집 귀퉁이가 다 해지도록 반복했던 그 시절이 겹쳐 보였습니다. 기본을 가르치는 건 사랑한다는 말보다 훨씬 오래 걸리고, 훨씬 오래 남습니다.
방송 이후에도 이어진 만두
인간극장 방영 이후 권형도 씨는 원주시 행구동에 별도의 가게를 열어 아버지에게 배운 만두를 이어갔습니다. 2019년 지역 언론 보도에서는 중앙동 본점을 부모님이, 행구점을 형도 씨가 운영하는 것으로 소개됐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방송에서 이 가족의 만두가 소개됐습니다. 2024년 12월 EBS ‘한국기행’에서는 권형도 씨가 배추를 고르고 김치만두를 빚는 모습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방송에서 아버지에게 배우던 아들이 이제 자기 가게에서 그 과정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만두 만드는 기술보다 오래간 건 아마 그 기본을 대하는 마음가짐이었을 겁니다. 저도 이제 수학 문제를 풀 일은 없지만, 뭔가 막힐 때마다 여전히 기본으로 돌아가 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주신 방식 그대로요. 정석 문제집은 이제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시절 반복했던 습관만큼은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3대원주김치만두
본점: 강원도 원주시 중앙시장길 31-2, 시민전통시장 38호
행구점: 강원도 원주시 행구로 47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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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KBS 인간극장 - 아버지의 만두 (2010. 10. 18 ~ 10. 22.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5KQ_n0EuWUY&t=110s
원주투데이 – 3대원주김치만두 권형도 대표
https://www.wonju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747&utm
EBS 한국기행 – 겨울, 고수를 만나다 ‘만두와 사랑에 빠지다’
https://www.youtube.com/watch?v=zsDTrsD0h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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